최영아 동문. 제공=홍보실
최영아 동문. 제공=홍보실

20년. 최영아 동문(의학·95년졸)이 노숙인과 취약계층을 위해 힘써온 시간이다. 최 동문은 내과 전문의를 취득한 2001년 이후, 20년간 의료보험이 없는 가난한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병원에서 근무해왔다. 현재 공공의료 기관인 서울서북병원에선 의사로, 취약계층의 의료·생활 지원을 돕는 법인인 ‘회복나눔네트워크’에선 대표로 사회의 건강 회복을 돕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아온 공로를 인정받아 최 동문은 2020년 제18회 ‘자랑스러운 이화인’에 선정됐다.

7월27일, 서울서북병원 앞에서 최 동문을 만났다. 인터뷰에 앞서 보여줄 것이 있다던 최 동문은 기자를 자동차 조수석에 태웠다. 그는 약 30분간 직접 은평구를 보여줬다. 장애인들의 재활을 돕는 서부재활체육센터, 성인 남성 노숙인 시설인 시립은평의마을, 길 위에 있는 많은 공공임대주택까지. 그와 함께 둘러본 은평구의 가장자리는 취약계층을 위한 곳이자, ‘노숙인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그의 직장이었다.

 

노숙인을 위한 ‘의사 최영아’

노숙인과의 인연은 1990년 예과 2학년, 청량리에 무료 급식 봉사활동을 가서 시작됐다. 최 동문은 청량리 시장 흙바닥에서 비를 맞으며 식판에 밥을 받아 먹는 노숙인을 보게 됐다. “당시 내 안에 ‘이들은 얼마나 질병이 많을까?’, ‘어떤 질병을 앓고 있을까?’, ‘왜 노숙을 하게 될까?’와 같은 질문들이 생겼다”며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노숙인 진료를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최 동문은 19년 전 국공립 병원의 문을 두드리려다 민간 자선 병원으로 발을 돌렸다. 당시 노숙인 환자를 위한 공공의료 서비스가 거의 없어, 국공립 병원보단 민간 자선 병원에서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립병원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2011년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 이후, 의료보험이 없는 노숙자들에게도 노숙자증을 발급해 국가에서 병원비를 지급할 수 있게 됐다. 그 덕에 시립병원은 이 환자들을 치료하고 입원시킬 수 있게 됐고, 최 동문도 시립병원의 노숙인 치료 시스템을 신뢰할 수 있게 됐다.

“네 번째 근무지인 마리아수녀회 도티기념 병원이 문을 닫아, 2017년 8월 시립병원인 서북병원에 오게 됐어요. 도티기념병원에 있을 때, 환자들을 시립병원으로 보내는 일을 하며 시립병원과 네트워크를 형성했거든요. 네트워크를 통해 시립병원이 믿을만하게 좋아졌다고 생각하게 됐죠.”

노숙인들을 치료하며 최 동문은 건강과 생활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노숙인들의 삶이 바뀌어야만 건강해질 수 있고, 그 중심엔 ‘주거’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2009년 소외계층 여성들을 위한 응급 보호 쉼터인 ‘마더하우스’를 설립했다. 현재는 이를 확장한 ‘회복나눔네트워크’의 대표를 맡아 노숙인들을 비롯한 소외계층의 의료 지원과 생활 지원을 돕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최 동문. 그는 많은 시설과 병원이 노숙인 문제에 대해 단편적인 지원만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노숙인의 진료는 정신과적 질환과 내과적 만성질환 모두를 다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노숙인은 주거, 가족, 건강 등 총체적인 문제”를 지닌다며 “현존하는 기관들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할 때 보람차다는 그는 내과 전문의의 일반적인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의사는 돈을 잘 버는 직업’이라는 통념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래도 그는 행복하다. “물론 돈이 많으면 마음대로 돈을 써볼 수는 있겠지만, 그게 나에게 꼭 좋을 것 같진 않았어요.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행복은 돈과 별개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또, 돈이 없어 홀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일의 보람도 느껴요.”

 

엄마와 선배로서의 ‘인간 최영아’

최 동문은 사회에선 의사로, 가정에선 엄마로 두 삶을 열심히 살아왔다. 그를 지탱해주는 건 배우자다. 최 동문이 추진하는 일을 정신적으로 돕고, 맞벌이하며 경제적으로 지지해주기 때문이다. 서로 의견이 부딪힐 때도 있지만, 그 역시 대화로 풀어나가며 오손도손 살아왔다.

그에겐 중학생인 딸과, 군을 제대한 아들이 있다. 두 아이의 성장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다. 레지던트 시절엔 옆집이었던 시댁의, 첫 직장인 다일천사병원을 개원할 땐 직접 꾸린 ‘공동체’의 도움을 받았다. 첫째가 세 돌 지나 어른의 손이 필요할 땐, 병원 옆에 집을 두고 세 가족이 같이 살았다. 그는 “병원 일도 같이하고 공동으로 아이도 키웠다” 고 전했다.

이후 최 동문은 두 번째 직장인 요셉의원에서 오후에만 근무했다. 오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 일과의 병행이 비교적 수월했다. 8살 터울인 둘째 임신을 계획하고 출산한 것도 이때다. 출산 이후엔 약 8개월을 쉬며,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을 지켜볼 수 있었다.

최 동문은 ‘이화’와 12년을 함께 했다. 본교를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부속 학교였던 금란여중과 금란여고 출신이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이대에서 채플을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중학교 2학년 때, 이대 교정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어요. 그땐 잘 모르고 어린 마음에 받았던 것 같아요 (웃음).”

대학 입학 후, 학과 대표와 학생 운동을 이끌던 사회부 활동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최 동문은 공부한 기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는 “너무 오래돼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도서관에 자리를 맡아 두고 의대 친구들과 공부하는 게 주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자원봉사에 관심이 많아 대학 친구들을 봉사에 많이 데리고 가기도 했다.

서울 곳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봐왔던 최 동문은 이화인에게 “일단 경험해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근처에 가봐야 알 수 있어요.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를 돌보는 공적 일자리가 많아져서 어디를 가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러니 기회가 닿는 대로 다양한 곳에서 미리 경험하는 게 자신의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용기를 내서 한번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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