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함께할 사람을 뽑는 일. 미국 파나소닉(Panasonic)에서 인사 채용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강명원 동문(생활미술과·85년졸). 2월의 어느 날, 미국 뉴저지주(New Jersey)에 있는 파나소닉 회사에서 강 동문을 만났다.

북미 파나소닉사 최고 인사 책임자 강명원 동문
황보현 기자 bohyunhwang@ewhain.net

“사실 전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인데, 성격과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네요.(웃음)”

자신을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 동문. 그는 졸업 직후,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미국행을 택했다. 사실 강 동문은 취업에 대한 생각이 크지 않았었다.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그림을 그리는 게 그의 꿈이 었다. 하지만 결혼 이후의 삶은 강 동문의 생각을 바꾸었다.

“아이를 낳고 보니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재정적으로 독립된, 주체적인 사람이 돼야겠다고 절실하게 느꼈어요.”

처음 직장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파나소닉이었다. 강 동문은 이중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법률 비서(legal bilingual secrtary)를 구하는 모집 공고에 지원했다. 그는 능숙한 일본어 실력으로 단번에 합격했다. 이후 기획실 비서로 일하던 중, 강 동문은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이 그를 좀 더 새롭고 전문적인 일로 이끌었다.

인사과로 지원을 하고,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여러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그러던 중 2001년, 회사의 제안으로 강 동문은 일본의 파나소닉 본사로 가게 됐다. 일본에서 글로벌 인사관리 팀장(international HR team leader)으로 경력을 쌓았다.

일본으로 간 지 3년 만에 강 동문은 미국 파나소닉의 인사 책임자로 돌아왔다. 그는 인사 책임자가 된 이후 3개월 만에 10kg이 빠졌다. “인사 책임자로 발령받고 2개월 뒤 큰 구조조정이 있었어요. 3천 명 중에 천 명을 해고해야 했어요. 사람을 내보내는 일이 죄송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엄청 힘들었어요.”

구조조정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소송이 걸린 적도 있었다. “한 부하직원이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일하느라 힘들어하길래 ‘지금은 잠시 일을 줄이고, 넌 능력이 많으니까 아이가 더 큰 다음에 일을 늘리자’고 했었어요. 결국에는 그 친구가 나가게 됐는데, 제가 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더라고요. 나중에는 돈이 목적이었다는 걸 알고 그땐 엄청 괴로웠죠.”

맡은 일을 잘해오던 그였지만 미국 회사에서 지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일이 힘든 건 물론이고, 차별도 받았다. 강 동문이 인사 책임자로 발령받아 왔을 당시, 그의 밑에는 부하직원이 10명, 그중 백인 남성 부장 8명이 있었다. 한 번은 그중 부장 1명과 의견이 부딪힌 적이 있다. 회사 미팅 중 있었던 일이다.

“본 주제와 다른 말을 하기에 확인상 물어 보고 또 물어봤더니, ‘너는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것 같아(you don’t understand what I’m talking about)’ 이러더라고요. 저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고 무시했던 거죠. 그래서 제가 ‘네가 내 말을 이해 못한 거야(I don’t think you understand what I’m talking about)’라고 했죠. 나중에 그 사람이 미안하다 그러더라고요.”

“동양 여자로 일하려면 힘든 일이 많이 있죠. 근데 그게 항상 나쁜 건 아니에요. 상대방이 자기의 약점을 쉽게 보이기 때문이죠. 본래 보장받은 여성의 권한을 주장할 필요는 있지만, 자신이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요. 왜 내가 약자에요. 제일 중요한 건, 자신과의 싸움이죠.” 1987년부터 지금까지, 약 30년이 넘게 파나소닉에 몸담고 있는 강 동문. 힘든 적이 많았지만, 단단한 마음가짐으로 즐기면서 견뎌냈다.

그의 단단한 마음가짐은 이화에서부터 시작됐다. 이화에게 고마운 점이 많다는 강 동문. “이화에서 저는 인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어요. 많이 놀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죠. 그 사람들에게서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자극을 받으면서 성장했던 것 같아요. 상상력도 많이 키웠고요.”

강 동문이 기억하는 이화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그림 그렸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 다고 했다.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였죠. 마지막까지 열심히 그림을 그리느라 한겨울에 맨발인 채로 뛰어가 버스를 탔었어요. 그때 물감이 여기저기 발에 묻어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봤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이화를 추억하는 그는 여전히 그림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이화에 정이 많은 만큼 후배 양성에 힘쓰고 싶다는 강 동문. “저도 어느 정도 자리 잡았으니 이제는 후배들을 돕고 싶어요.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후배들이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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