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김지선 기자. 그는 서울지방경찰청 출입기자로 시경캡을 맡고 있다.이다현 기자 9421d@ewhain.net
YTN 김지선 기자. 그는 서울지방경찰청 출입기자로 시경캡을 맡고 있다.
이다현 기자 9421d@ewhain.net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서울지방경찰청(시경). 시경은 언론사들의 핵심 취재처다. 사건기자들을 관리하며 이들의 취재를 지도하는 건 사건팀장 시경캡의 몫이다. 관용차가 나올 만큼 힘든 업무 때문인지 언론사엔 여성 시경캡이 나온 지가 채 20년도 되지 않았다. 손에 꼽히는 여성 시경캡 중 한 명으로 활약 중인 이화인이 있다. YTN 시경캡 김지선 기자(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 전공 석사과정)다. 본지는 5월 22일 서울지방경찰청에서 김 기자를 만났다. 취재보고가 한창이던 오후 1시, 오른쪽 귀엔 무선이어폰을 꽂은 채 인터뷰에 임하던 모습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의 일상이 느껴졌다.

“처음 YTN에 입사했을 때, ‘나도 언젠간 캡이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어요.”

시경캡이 된 지 3개월째. 김 기자의 하루는 오전6시부터 시작된다. 서울지방경찰청으로 출근한 뒤, 김 기자는 가장 먼저 조간신문을 확인하고 밤사이 발생한 사건·사고들을 살핀다. 이후 후배 기자들에게 받은 취재보고를 모두 취합하고 취재계획을 정리해 사회부장에게 보고한다. 출근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 모든 일들이 이뤄진다.

취재보고를 받고, 데스크(편집국장)와 취재 방향을 논의하는 그의 모습은 이미 일이 익숙해진 듯 보였다. “처음에는 캡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장 기자와 데스크 사이 중간 보고자 역할만 한다고 생각했죠. 근데 사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과 최종적으로 기사를 내보내는 데스크의 생각 사이에는 괴리가 있어요. 그 괴리를 시경캡이 적절히 조절해주는 거죠.”

김 기자는 1명의 바이스(부캡), 11명의 사건 기자와 함께하고 있다. 시경캡은 입사한 신입 기자들을 기자로서 키워내는 교육도 담당한다. 신입 기자들의 교육부터 출고할 기사까지 모두 책임지는 자리인 만큼 일은 고될 수밖에 없다. 퇴근 이후에도 일은 계속된다. 김 기자는 집으로 가는 내내 기자들과 통화를 하며 모바일로 기자들이 쓴 기사를 살펴본다. “사실 퇴근이 몸만 이동하는 거지, 집에서도 계속 기자들과 전화를 하고 메신저로 연락해요. 워라벨(Work-life balance)이 지켜지긴 어렵죠.”

기자 인생 14년. 그는 사회부와 정치부를 여러 번 거쳤다. 김 기자가 통일외교안보부에 있었을 당시, 북미정상회담이 열렸고 그 역시 현장에 있었다. 김 기자는 기자 생활에서 평생 남을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김 기자는 입사 1년 차였던 2008년, 첫 YTN 특종상을 받았다. 당시 안양 초등생을 살해한 용의자의 검거 과정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첫 특종상 이후 현재까지 약 12개의 보도상을 받았다. 그는 2013년 받은 ‘노근리평화상’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국 행을 희망하던 탈북청소년들이 라오스에서 추방된 사건을 보도하고 받은 상이었다.

현장 보도에 대한 열정은 그를 내전이 한창인 시리아로 이끌었다. 전쟁, 재난을 전문으로 취재하는 순회특파원 공고에 망설임 없이 자원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한쪽에선 축제가 한창이었지만 김 기자는 몇 주간 머물며 국경 지역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마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종군기자였지만 조금 더 위험할 뿐 국내 취재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며 “외국이니 한국이 개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문화적 맥락을 잡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시리아 국경 안으로도 들어가야겠다는 욕심이 있었죠. 거기서 만난 시민군이 돈을 내면 그들 루트로 시리아 안에 데려가 주겠다고 제안했어요. 솔깃했지만 거래를 하고 시리아로 들어가지 않았어요. 얼마 뒤에 바로 그 루트에서 폭격으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섬뜩했죠.” 이때 김 기자는 전쟁터에선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8년이 흐른 지금, 시리아 내전 취재는 그의 기자 인생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됐다.

그가 14년을 기자로서 일할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김 기자는 기자라는 직업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일단 기자라는 직업이 너무 재밌어요. 일반 회사원이 만난 사람들보다 10배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났을 거고,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투철한 사명감 때문이라기보단 ‘많이, 또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에 기자 일이 즐거웠죠.”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단점은 취향이 늙었다는 거죠. 50대 아저씨가 제일 편해요. 20대 후반에 정치부에 출입할 때 또래 친구들을 만나도 이야기 주제가 지루했어요. 시계만 보면서 내일 여의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했죠. 그때 스스로가 안쓰럽기도 했어요.” 기자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은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투쟁’과 같은 상황에 김 기자를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

이화에서의 학창 시절을 김 기자는 어떻게 추억할까. 이화에서의 생활을 독립심과 자립심을 길러 준 시간이라고 소개한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일반대학원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학부 때는 언론홍보영상학부(현 커뮤니케이 션·미디어학부)에서 공부하며 학부 동아리 ‘EWHA TV’(이화티비) 보도국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이화에서 여성끼리 4년 동안 붙어있던 시절은 저를 강하게 만들었어요.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성장할 수 있던 시간이에요. 채플 때 카메라랑 삼각대를 양 어깨에 끼고 대강당을 뛰어 올라간 간 적도 있어요. 그만큼 혼자 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죠.”

이화에서의 배움은 방송기자로서 그의 활약에도 자양분이 됐다. 여성이라고 위축되지 말자는 그의 신념을 굳건히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론환경은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바뀌었다. 김 기자는 “여성이 기자로서 훨씬 뛰어난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사실 이런 시대에서 회사가 성 비율을 맞춰 남자 둘 여자 둘 수습기자를 뽑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아직도 여기자들은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 회사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할 말이 없긴 하죠. 시경캡 역시 능력이 더 좋으면 성별을 막론하고 뽑는 환경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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