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혜연 기자
그래픽=김혜연 기자 kimhy859@ewhain.net

‘이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최초와 최고의 역사’ 본교는 수많은 여성 지식인을 배출했고, 이들은 ‘이화인’으로 한데 묶였다. 본지는 그동안 주목받지 않은 이화인의 업적을 발굴하고 그의 생애를 회고하는 ‘최초의 이화 최고의 이화’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번 호에서는 근대 최초 여성 음악가이자 독립유공자인 고(故) 임배세 선생(이화학당 6회 졸업)을 조명한다.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푼 안 쓰려네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조선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중략)

전국 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빛내리”

─임배세 선생의 ‘금주가’ 중

 

일제 강점기, 힘든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먹던 사람들. 이들에게 술값을 아껴 학교를 세우고 자녀교육에 힘쓰자는 메시지를 전한 이가 있다. 찬송가 ‘금주가(禁酒歌)’(1918년)를 작사·작곡한 이화학당 출신 고(故) 임배세 선생이다. 임배세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 최초의 여성 음악가로 윤심덕, 홍난파와 함께 당대에 유명세를 떨쳤지만, 후대에 와서는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금주가 악보황보현 기자
금주가 악보
황보현 기자 bohyunhwang@ewhain.net

2018년 12월, 그를 추모하듯 그의 일대기를 담은 연구 논문 한 편이 세상에 나왔다. 본교에서 학·석·박사 과정을 모두 밟은 동문이자 음악대학 작곡과 강사인 장정윤 박사의 ‘한국 근대 최초의 여성 음악가 임배세(1897∼1999년): 노래로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다’다. 이 논문을 계기로 임배세 선생의 유족들이 독립유공자 지정 신청을 했고 올해 3·1절 101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이 모든 것은 이화학당 성악 전공 6회 졸업생이라는 기록 하나에서 시작됐다. 장 박사는 이 연구를 “미국과 한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기록을 한데 모아 그 퍼즐을 맞추는 과정”에 비유했다. 지난 17일 본지는 광화문 모처에서 장 박사와 임배세 선생의 조카 동암교회 임수완 장로를 만나 그 뒷이야기를 들었다.

 

첫 번째 퍼즐, 조선의 ‘꾀꼬리’ 임배세가 금주가를 만들기까지

북돋을 배, 세상 세. 임배세(培世). 본명은 임을선(乙仙)이다. ‘배세’라는 이름은 세상을 넓게 살라는 의미로 임배세 선생의 모친이 지어줬다. 미국서는 Bessie(베시)라는 이름을 썼다. 꾀꼬리 같은 음색과 똑 부러지는 성격으로 일찍이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서 이화 학당으로 먼 유학길을 떠났다. 1915년 이화학 당 중학과를 졸업하고 대학과에 진학해 성악을 전공했다. 1년 상급생인 김활란 초대총장과 막역한 사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교회 활동을 하셨어요. 피아노 반주나 독창도 하셨죠. 음악적 조예도 깊고 재능도 있으셔서 당시에 ‘꾀꼬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어요. 일제 강점기 당시 함께 연주했던 음악가 중엔 지금도 유명한 홍난파 같은 분들이 있어요.”

임수완 장로 황보현 기자
임수완 장로
황보현 기자 bohyunhwang@ewhain.net

임 장로가 회고하는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기독교적 신앙심은 찬송가를 만들 기회로 이어졌다. 장 박사는 “임배세 선생은 학부생 시절 다니던 교회 목사가 노래를 만들어 보겠냐는 제안을 흘려듣지 않고 노래를 만들었다”며 ‘금주가’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임배세 선생은 선율을 직접 만들고 가사까지 붙였다. 당시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일제 강점기엔 한국인이 서양 찬송가 선율에 가사를 붙이는 일조차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금주가는 음악적으로도 호평받는다. 오늘날 중독성 있는 노래를 일컫는 후크송(Hook Song)처럼 금주가의 선율과 화성은 쉽게 따라 부르고 기억할 수 있다. 장 박사는 “지금처럼 작곡에 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못한 상태에서 쓴 곡이니 음악적인 재능이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금주가의 가사는 시대상도 충분히 반영한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뜻이 깊은 거죠. 일제 강점기엔 직접적으로 표현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었을 거예요. ‘술을 먹지 말고 학교를 세우자.’ 이렇게요.” 장 박사는 당시 금주가가 사회적인 파급력이 컸음을 강조했다. 노래는 본인도 부르면서 의미를 되새기고, 주위 사람도 따라 부르게 하기에 파급력이 크다. 금주가는 계몽적 가사 탓에 일제로부터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두 번째 퍼즐, 미국에 건너가서도 외친 ‘대한 독립 만세’

이화학당 교사 생활을 마친 임배세 선생은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기독학원에서 교사로 일했다. 이때부터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적 책임감이 더욱 짙어졌다.

“생전에 ‘내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은 음악인 것 같고, 곧 사명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던 정도였죠. 근데 그보다도 컸던 것이 ‘크리스찬’이라는 정체성이었어요.” 장 박사가 말했다.

장정윤 박사황보현 기자
장정윤 박사
황보현 기자 bohyunhwang@ewhain.net

1927년 오벌린 음악대학(Oberlin Conservatory)에서 공부하던 임배세 선생은 일리노이 웨슬리언 대학(Illinois Wesleyan University)으로 갔다. 거기서 종교교육을 전공했다. 물론 전공을 옮긴 후에도 음악을 멈추진 않았다. 미국에 있는 한인들끼리의 음악회와 교인들과 하는 음악회에도 계속해서 섰다. 항상 소프라노로서 무대에 서는 개인적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름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그였다. 조카 임 장로는 “임배세 선생은 그의 어머니 영향으로 신앙심이 돈독했고 일평생 신앙심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며 그를 추억했다.

미국에서의 결혼 이후 그는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1928년 6월 임배세 선생은 사업가 김경 선생과 혼인했다. 사업가이자 독립유공자인 김경 선생은 시카고에서 카페테리아 체인점 서너 개를 운영하는 신흥 사업가였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한 공을 일찍이 인정받아 1986년 애족장 표창을 받았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김경 고모부님이 상해 임시 정부로 독립자금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요. 고모님도 독립운동 후원에 함께했고요. 외부적으로는 사업가지만 사실 수익을 모아 독립 후원금으로 보내셨죠.” 임 장로는 당시 자금이 상해 임시정부 월세를 내고 독립운동가들이 두 달 정도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임배세 선생의 생애를 연구하던 장 박사는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편지 한 통을 봤다. ‘김배세’라는 이름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쓴 편지였다. “임배세 선생이 쓴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차에, 편지가 쓰인 종이에 김경 선생님이 운영하셨던 워싱턴 카페테리아의 주소가 적혀있는 걸 발견했어요.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죠.” 독립운동 발자취를 좇던 장 박사는 이 일을 계기로 임배세 선생의 업적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워싱턴 카페테리아의 메모지에 적힌 편지는 ‘안부인 상서’라는 말로 시작된다. 1932년 안창호가 상해에서 체포 당한 것을 위로하고, 이 여사의 헌신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에서 독립운동가 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위로하고자 했던 그의 모습뿐만 아니라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던 마음도 읽을 수 있다.

그는 미주 한인사회에서 후원 모금 활동도 진행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다. ‘독립금’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후원 활동을 한 기록도 있다. 한인사회에서 한두 푼씩 모아 독립 후원금 명목으로 부친 것이었다.

 

세 번째 퍼즐, 한평생 불꽃 같았던 그의 삶

독립 이후에도 임배세 선생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노력했다. “유학 전부터 인터뷰에서 매번 자신은 음악가로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걸 평생 몸소 보여주신 거 같아요.” 장 박사는 임배세 선생이 미주 한인사회에서 한국을 도울 수 있는 역할을 끊임없이 찾았다고 설명했다.

한국전쟁 시기 임배세 선생은 비공식 원조기구인 ‘한미재단’에서 일했다. ‘한미재단’에서 임배세 선생은 미국 전역에서 구호 물품을 모아 한국에 전달했다. 구호 물품 전달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한인 동포들에게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70년부터는 ‘이화국제재단’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며 학교 발전을 위해 힘썼다. 미주 지역 동창에게 성금을 모아 학교에 보내고, 국제학생 및 교수 교환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도 했다. 임 장로는 “한평생 불꽃같은 삶을 사셨다”며 그를 떠올렸다.

1일 ‘임배세’는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국가 보훈처에서 101주년 3·1절을 기념해 그를 유공자로 포상했다. 임 장로는 독립유공자 선정이 “우리 가문을 넘어 학교에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전했다.

“장 박사가 연구한 논문이 나온 다음 해가 마침 3.1절 100주년이었어요. 손자들끼리 둘러앉아 ‘우리 가문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했죠.”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보훈처에 심사를 요청한 후 포상을 받기까지만 8개월이 걸렸다고 임 장로는 전했다. 올해 독립유공자로 지정이 됐지만, 훈장을 직접 받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임배세 선생이 생전 직계 자손이 없었다는 사실을 공적 자료로 증명해야 방계 자손이 수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 장로는 “뉴욕주에 사망확인서 등 증명서를 신청한 상태”라며 “워낙 오래된 자료라서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장 박사가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가는 과정에서도 생각지 못한 걸림돌이 있었다. 임배세 선생의 이름이 남편 김경 선생의 성을 따 ‘김배세’라고 돼 있었기 때문이다.

“임배세 선생이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김배세’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해서 자료를 찾기가 더 어려웠어요. 미국에서 실린 지역신문이나 그가 다니던 학교의 학보사 신문을 보고 이름을 찾으며 선생님의 행적을 하나하나 맞춰봤죠.”

나의 성경 악보황보현 기자
나의 성경 악보
황보현 기자 bohyunhwang@ewhain.net

장 박사는 연구 과정에서 임 장로를 비롯한 임배세 선생의 가족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전한다. 장 박사의 연구 논문에 소개된 창작곡 ‘나의 성경’(1938년 추정)도 임 장로가 보관하고 있던 악보였다. 이 곡은 장 박사의 연구를 통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게 됐다. 기존에 알려진 임배세 선생의 창작곡은 ‘금주가’가 유일했다. 현재는 국제음악원전기 구(RISM)에 두 곡 모두 등록돼 있다.

“처음에는 ‘임배세’라는 음악가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으로 연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보니까 이 인물의 삶을 다 조명해야겠다고 느꼈죠. 독립유공자라는 결과로 이어져 감사할 따름이에요.” 장 박사는 연구로 발굴한 인물이 독립운동의 공도 인정받아 기쁜 마음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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