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도와주고 싶고, 정말 이기고 싶은 사건을 맡아서 하는 거죠. 여기서 오는 충족감, 보람은 제가 변호사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비 형부에게 성폭력을 당했지만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피해 사실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 필리핀 출신 ㄱ씨. 태어나자마자 입양됐지만 강제추방돼 4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해외 입양인 ㄴ씨. 이들이 세상에 빛 한줄기 없다고 느낄 때, 두 팔 벌려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 준 변호사가 있다.  ‘국내 1호’ 공익 변호사 소라미(영문·97년졸) 동문이다. 햇살이 따스하게 봄이 왔음을 알렸던 지난 8일, 서울대 공익법률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소라미 변호사 bohyunhwang@ewhain.net
소라미 변호사
황보현 기자 bohyunhwang@ewhain.net

사법연수원 수료 직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식구들과 2018년까지 15년 한솥밥을 먹었다. 작년 3월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법전원)으로 둥지를 옮겨 미래의 공익법률가를 키우는 공익법률센터 부센터장을 맡고 있다.

소 변호사는 본교 영문과 졸업 후, 고려대 법과대학에 학사편입했다. 그가 공익 변호사로서 출발선에 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학부 시절, 사회에 나가면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어릴 적 꿈이 법조인이었던 것이 떠올라 사법시험을 봐야겠다고 결심했죠. ”

공부만 해왔을 것 같은 그의 학창 시절은 사실 동아리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소 변호사는 민속극연구회 ‘탈’에서 3년 내내 활동하고 동아리 회장과 동아리연합회 부회장까지 지냈다. 대동제 땐 마당극 공연도 하고, 농촌활동을 가서는 풍물놀이와 길놀이도 했다. “대학생이면 탈춤 정돈 춰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시작했어요. 주위에서 제 전공을 ‘탈과’, ‘탈반’ 뭐 이렇게 부르기도 했어요.” 동아리 시절을 얘기하는 그에겐 아직도 ‘탈’에 대한 애정이 듬뿍 남아 있었다.

동아리와 학생자치 활동은 이화를 나와 법조계에 진출해서 그 진가를 발했다. 모델이 없는 공익 변호사 그룹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선 법률적 기초 외에도 회의·홍보·소통 능력이 필요했다. 지지자를 끌어내고 많은 이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공익적인 가치를 생성하는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죠. 법률 관련 책만 읽고 판례만 공부한 후 연수원을 수료했으면 훨씬 힘들었을 거예요. 결국 변호사 활동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하는 일이니 사람 간의 관계도 중요하고요.”

이외에도 학부 시절 이화에서 보고 느낀 것들은 그가 약자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도움을 줬다. 그가 학부생이던 90년대 초중반, 학내에서 여성위원회가 처음 생겨났고, 대학생들의 페미니즘 운동을 소모임, 자치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소 변호사가 학부 1학년이던 1992년, 미군 기지촌 여성이 미군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사회적 공분을 샀고, 학내외에선 집회도 많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두천으로 미군 기지촌의 성산업 종사 여성을 돕는 봉사활동을 떠나기도 했다. “그때 경험이 공감에서 일할 때 기지촌 성산업에 유입된 이주여성들에게 관심을 지닌 동력이 됐어요.”

여성 인권문제, 그중에서도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이주여성은 그의 주된 관심분야다. 그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크게 일었던 미투(#MeToo) 이슈와 결혼이주여성의 문제엔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모두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피해 정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도 있는 거죠.”

결혼 이주여성을 변호할 때 대게 언어의 장벽으로 피해 정황을 완벽하게 진술받기가 힘들다. 특히 법률 용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 예로 ‘폭행협박’이라는 단어는 언어적 이해가 어려울뿐더러 문화권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 소 변호사는 “그들의 변론을 위해 피해자 면담을 할 때 질문을 보다 자세히 풀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맡은 사건 중엔 중 필리핀 여성이 언니 결혼식 차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머물다가 예비 형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돼 “이건 분명 부당하다”고 판단해 항소심부터 여성 단체와 함께 피해자 법률 지원을 했다. 피해자가 왜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고,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어떠한 내색도 하지 못했는지를 변론해 항소심에선 징역 7년 형으로 법정 구속됐다.

이주여성부터 입양아동, 난민들까지. 사회 곳곳에 문제 의식을 지니고 주체적으로 법률 활동을 해내는 그의 모습 역시 이화에서의 배움이 큰 몫을 했다. 그는 여성이라서 주눅들거나, 뒤로 물러선 경험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학교 다닐 때 어디서든, 어느 상황이든, 내가 주체적일 수 있고, 내가 앞에서 이끌 수 있다는 경험들을 했던 게 굉장히 소중하죠.”

이젠 나아가 법전원 학생들과 그 경험을 나누고 있다. 소 변호사는 작년부터 서울대 법전원에서 임상법학(리걸클리닉) 수업을 개설해 학생들과 사건을 함께 해결하고 있다. 작년엔 아동인권클리닉 수업을 개설해 강제추방 해외 입양인의 국가 배상 소송 건을 학생들과 함께 했다. 사실 그는 ‘공감’ 재직 당시 입양특례법 개정을 이뤄내기도 했으며,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아동인권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한 아동인권 분야 최고의 전문가다.

누구도 걷지 않았던 공익 변호사의 길에서 15년. 소 변호사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누가 시켜서하는 일이 아니라 온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동력입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이기적인 선택인 것이지요(웃음). 게다가 보통 일반 변호사들이 하지 않던 일을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쉽게 전문성을 쌓을 수가 있고 사회적으로 발언할 기회까지 주어졌지요.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어 보람 있었습니다.”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모든 활동이 그에겐 공익변호사의 삶을 지킨 소중한 동력이 됐다.

그는 법전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에 “다양한 경험을 자산으로 삼기”를 조언하기도 했다. ‘어떤 법조인이 되고 싶은지, 왜 법조인이 되고 싶은지’를 고민하길 바랍니다. 법조인이 돼도 ‘좋은’ 법조인이 돼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이 어떤지도 이해해야 하거든요. 학부 때 경험을 다양하게 해보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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