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꾼 벌하는 선녀, 탈코르셋한 박씨… 전래동화를 뒤집다
나무꾼 벌하는 선녀, 탈코르셋한 박씨… 전래동화를 뒤집다
  • 이수연 기자
  • 승인 2019.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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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전래동화 「선녀는 참지 않았다」 출간한 95년생 독서모임 '구오'
구오
'구오'는 기존의 가부장적, 남성중심적인 전래동화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다시 썼다. 왼쪽부터 장유진씨, 이다은씨, 고현지씨, 이경민씨, 두애린씨. 황보현 기자 bohyunhwang@ewhain.net 

“목욕하던 선녀들의 알몸을 몰래 엿본 죄,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 죄, 선녀를 강제로 데려가 아내로 삼으려 한 죄를 지은 나무꾼에게는 천 일간 투명 옷을 입을 것을 명한다.”

선녀의 옷을 훔쳐 간 죄로 벌 받는 나무꾼, 요리하길 좋아하는 우렁총각, 계모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난 장화와 홍련. 기존 전래동화와 다른 이야기들이 책 「선녀는 참지 않았다」 속에서 펼쳐진다. 익숙한 전래동화 10편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다시 쓴 페미니즘 전래동화책이다. 이 책을 공동으로 펴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본교 독서 모임 ‘구오’를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구오’는 고현지(국문·14), 두애린(영문·18년졸), 이경민(국제·18년졸), 이다은(사회·18년졸), 장유진(심리·14) 다섯 명의 친구가 모여 시작됐다. '함께 깨닫는다'는 의미의 구오(俱悟), 여기에 95년생 동갑내기라는 의미가 덧붙여졌다. 이들은 2015년 2학기 김지혜 교수(호크마교양대학)의 <고전읽기와글쓰기> 수업에서 만나 종강 후에도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공유하는 만남을 이어갔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던 구오는 ‘우리들만의 페미니즘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에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래동화에서 부수적, 소모적 역할로만 그려졌던 여성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고자 했다. 여러 장르 중 전래동화를 택한 이유 중에는 백설 공주 이야기에 여성주의를 입혀 재해석한 서양의 「흑설 공주 이야기」 영향도 있었다.

“우리나라 전래동화도 충분히 재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보면 전래동화엔 여성 차별적이고 성도착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아요. 대중들에게 친숙하지만, 많이 다뤄지지 않은 이야기를 여성학적인 관점으로 각색해보면 의미 있을 것 같았죠.” (이경민씨)

2017년 말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텀블벅(tumblbug.com)에서 후원자 1124명, 목표금액의 1491%인 1491만 8800원을 후원받으며 출판에 성공했다. 작년 12월 발간된 초판은 ‘서동과 선화공주’, ‘선녀와 나무꾼’, ‘처용’, ‘우렁각시’, ‘장화홍련전’, ‘혹부리 영감’, ‘콩쥐팥쥐전’, ‘반쪽이’, ‘바리데기’ 9개의 이야기를 재해석했다. 이후 함께 쓴 ‘박씨전’을 추가한 개정판이 올해 5월에 나왔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 초판과 개정판(위즈덤하우스). 이화선 기자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선녀는 참지 않았다’라는 책 제목은 표지만 보고도 전래동화를 다시 썼음을 보여주고자 짓게 됐다. 두애린씨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선녀와 나무꾼”이라며 “기존 이야기 속 선녀가 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걸 제목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현지씨, 두애린씨, 이다은씨가 이야기를 쓰고, 이경민씨는 프로젝트 관리 및 책 편집 과정에 참여했다. 역할을 나누긴 했지만, 함께 회의하며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장유진씨는 책에 들어갈 삽화를 그렸다. 장씨는 심리학 전공이지만 그림에 대한 관심도 컸다. 모든 삽화를 연필로 스케치하고 컴퓨터로 채색해 22장의 그림을 그린 이유다. 장씨는 ‘선녀와 나무꾼’에 들어간 삽화 중 나체의 선녀들이 손잡고 춤추는 삽화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이 삽화에서는 특히 여성의 ‘몸’을 중심에 두고 작업했어요. 자연스럽고, 미화되지 않고, 각자의 특징이 담긴 몸을 그리고자 했죠. 여성의 몸을 외설적으로 보는 시선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어요.” (장유진씨)

프로젝트 목표를 달성해 출판할 수 있었지만,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줄거리부터 삽화, 디자인 등 책 제작의 전반적인 과정을 5명이 직접 해야 했다. 이경민씨는 “어떤 글꼴이 저작권에 괜찮은지, 여백을 어느 정도로 할지 정하는 게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고 했다. 도서관에서 책들의 여백을 살펴보곤 했다. 마지막 후반 작업 땐 밤샘 작업을 위해 숙소를 빌려 합숙을 하기도 했다.

“이야기의 방향성을 정할 때 고민을 가장 많이 했어요. 같은 페미니스트라도 다양한 관점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희가 아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진 않은지, 잘못된 방향으로 바꾸진 않았는지 끊임없이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 어려웠죠.”(두애린씨)

책을 출판하고 뿌듯한 일도 있었다. 출판 후 한 블로그 운영자가 그들의 책을 학습 자료로 활용했음을 알게 됐다. 이경민씨는 “학생 문고에 책을 뒀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면서 잘 읽었다는 글을 봤다”며 “어린아이들의 교육에도 활용될 수 있는 콘텐츠로 여겨지는 것 같아 뿌듯했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새로 해석한 이야기인 만큼 책에 대한 애정도 깊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묻자 이다은씨는 박씨전을, 장유진씨는 반쪽이를 골랐다. “탈코르셋과 같은 사회현상을 생각하면서 썼어요. 아낙들이 박씨의 허물을 벗게 도와주고, 박씨가 아낙들에게 도움을 주는, 여성연대의 선순환적인 모습이 좋았어요.” 이다은씨의 말이다. 

장유진씨는 “반쪽이의 주인공 연이 캐릭터를 좋아한다”며 “원래 반쪽이 작품에서 지워진 여성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조해나간다는 게 좋았다”고 전했다.

구오에게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같이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의미 있죠. 전에는 페미니즘을 알아도 얘기할 사람이 없어 무기력하기도 했는데 이젠 함께 얘기할 수 있어 힘이 나요.”(고현지씨)

「선녀는 참지 않았다」를 통해 첫발을 내디딘 구오는 10편 외에도 ‘단군신화’, ‘춘향전’ 등 한국 전래동화나 소설 중 다시 써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번 책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도 다시 재해석해 책을 쓴다면 좋지 않을까요. (웃음)”(구애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