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시상이,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이 되다
일상의 시상이,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이 되다
  • 박서영 기자
  • 승인 2019.0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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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동창문인회 이정자 회장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이화동창문인회 이정자 회장.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시를 이야기하는 자헌(慈軒) 이정자(기독·66년졸) 시인의 표정엔 소녀 같은 설렘과 깊이 있는 연륜이 동시에 느껴졌다. 봄날과 같이 화창한 미소에 청춘을 간직한 이 시인을 강변역 근처 식당에서 만났다.

 

이 시인은 시 장르 중 특히 ‘시조’와 함께 삶의 오랜 시간을 걸어왔다. 시조는 현대까지 이어온 고시가 갈래 중 하나다. 이 시인은 “시조는 율격이 있어 노래하듯 읽히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좋아하는 장르”라고 설명했다.

 

이 시인과 시조의 인연은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대학원에서 만난 월하 이태극 선생에게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등단에 도전했고, 등단한 이후엔 국문학 서적, 시조집, 수필집 등을 발간했다. 그는 건국대 교수,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한국시조협회 자문위원 등을 거쳐 현재 이대동창문인회(이문회) 회장직을 맡아 작품 활동과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이 시인은 주로 책상과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작품을 쓰고, 시조 번역을 하는 것 등이 그의 주요 업무다. 영감은 일상에서 얻는 편이다. “책을 읽을 때, 길을 가다가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여행을 할 때, 보고 듣고 느끼는 중에 시상이 꽂히면 곧바로 시작(詩作)으로 옮기는 편이에요.”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 시인의 창작 과정엔 큰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어떤 대상을 보고 시상이 떠오르면 메모를 해요. 그리고 조용한 시간에 완성하죠. 억지로 쓰지는 않아요. 월하 이태극 선생, 한뫼 전규태 선생이 말하는 것처럼 물이 흐르듯 시상이 흘러가죠.” 그럼에도 이 시인에게 시작(詩作)의 어려움을 굳이 꼽자면, 시작 외에 다른 일들 때문에 감성이 집중되지 않을 때다. “시작은 감성의 문제고, 논문은 지성의 문제라 두 개 사이에서 어려울 때가 가끔 있어요. 그래서 하나의 작업이 끝난 후 다른 하나로 옮겨가는 법을 알아갔죠.”

 

이 시인은 자신의 시 중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아버지의 산’(2017)을 꼽았다. ‘아버지의 산’은 시조집 「아버지의 산」의 표제 작품으로, 평시조 여러 수로 이뤄진 연시조 구성을 띈다. 이 시인에게 아버지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아버지는 내게 생명의 은인이고 학문의 스승이자, 나를 오늘날 이 자리에 올리신 분”이라며 “「제정공 이달충 문학 연구」(이정자, 2006) 역시 한학자(漢學者)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렇듯 「아버지의 산」은 이 시인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완성한 작품이다.

 

살다가 힘들 때도 넘어지고 싶을 때도

언제나 그 자리에 변치 않고 지켜준 건

내 곁에 우뚝 서 있는

아버지의 산이었다.

 

파란 것 어긋나서 실망 속에 있을 때도

허한 맘 다독이며 힘을 주던 그 말씀에

세상을 지켜보면서

절제하는 내가 됐다.

 

아버지 깊은 뜻을 지금에야 알 것 같아

나 또한 아이에게 다독이고 힘을 주어

그 옆에 조용히 서서

쉬어가는 산이 되리.

 

- 아버지의 산

 

‘아버지의 산’에 등장하는 ‘산’처럼, 이 시인의 작품엔 자연을 소재로 한 시조가 많다. 특히 그의 제10시조집의 전원시조 45편엔 농사 과정과 수확, 전원 풍경 등이 눈에 띈다. 이 시인은 “전원시조는 2015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했던 농사 경험을 토대로 쓴 전원일기”라며 “이는 다시 얻기 어려운 소중한 경험이자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직접 보고 듣는 것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이 시인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다채로운 색으로 그려진 수채화처럼, 이 시인의 시조엔 소박하고 무구한 단어들이 조화를 이룬 채 녹아 있다. 그 중 이 시인이 특별히 좋아하는 단어는 ‘절제’와 ‘도전’이다. “나를 절제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에 도전하는 것, 이 자체가 내가 걸어온 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단어들을 좋아해요. 특히 도전이 없으면 발전도 없죠.”

 

이 시인은 정년퇴임 후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시조 번역에 몰두했다. 세계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번역원에서조차 시조 번역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나서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한 결과, 이 시인이 번역한 시조는 수백 수에 이르렀고 지금까지도 그는 꾸준히 영역시조를 발표하고 있다. 이렇듯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 시인에겐 소망이 있다. “내가 이룬 것만큼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학자로, 시인으로, 시조 전문 번역가로 사람들에게 남고 싶어요.”

 

오랜 기간 이 시인과 함께 걸어 온 시조, 그렇기에 그에게 문예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문학은 정서의 순화예요.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잖아요. 책을 읽으며 꿈을 찾고, 꿈을 발견하고, 그 꿈을 향해 전진하며 나아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