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남한으로, 학자의 삶 이어나가는 현인애 교수를 만나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학자의 삶 이어나가는 현인애 교수를 만나다
  • 김수현 기자
  • 승인 2019.0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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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 북한학 교수 겸 남북하나재단 이사 현인애 교수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학업 성적이 좋아서 김일성 대학에 입학했어요. 한국처럼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입학한 건 아니지만 국내 입시제도로 따지자면 ‘내신전형’으로 합격한 거죠. 김일성 대학에서 사상 과목인 철학을 공부하고, 교수가 돼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남한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틀린 정보였지만요.”

북한 김일성 대학을 졸업해 철학 교수로 활동하다 탈북해 본교에서 북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있다. 바로 현인애 교수(북한학과)다. 현재는 남북하나재단 이사를 겸임하고 있는 그를 지난 1월31일 마포구 남북하나재단 건물 2층 카페에서 만났다.

현 교수가 탈북을 결심한 건 남편이 정치범으로 지목된 이후였다.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두 아이가 먼저 탈북하고, 1년 후 북한에 남아있던 그가 아이들을 따라왔다. 2004년, 그의 나이 마흔여덟 때의 일이었다.

약 50년간의 북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내려온 한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체계가 달랐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었다. 특히 물가를 알 수 없었다. 북한 돈과 남한 돈은 환율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드를 이용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탈북 후 놀랐던 건 한국의 중산층이 풍족하게 산다는 점이었다. 북한에서는 한국의 빈부격차가 심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원에 있을 때 탈북민들과 함께 당진 시골 마을에 간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시골이 부유하게 살아서 놀랐어요. 집마다 차가 있고 난방도 다 되더라고요.”

성 평등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에서는 북한이 한국보다 남녀가 평등하고,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천대받으며 산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현 교수는 한국에 도착한 후 ‘까무러치게’ 놀랐다. 그는 “북한에서 성 평등이 이뤄졌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며 “처음 남한에 왔을 땐 남한 여자들이 너무 ‘댕댕거린다’고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10년이 지나니 그 생각이 바뀌었다”며 “이제는 남자 탈북민들이 갑자기 왜 성 평등을 외치냐면서 날 싫어한다”고 덧붙였다.

현 교수가 하나원에 머물면서 가장 걱정했던 건 직업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새롭게 정착하려니 막막함이 앞섰다. 그는 “국가가 일자리를 배치해주냐고 물었을 정도로 한국 사회에 무지했다”며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밖에 모르는데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불안했다”고 말했다.

오전에는 우유를 배달하고 오후에는 다단계를 했다. 음식점에 취직하기 위해 요리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던 중 한국에선 늦은 나이에도 대학을 다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북한엔 전문직을 재교육하는 기관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에선 사회생활을 하다가도 다시 공부를 한다는 거예요. 내 나이에도 공부할 수 있냐고 묻자 그런 사람 많다고 하더라고요. 돈을 벌어야지 왜 공부를 하냐고 다른 탈북자들이 비웃었지만 다시 공부하고 싶었어요.”

처음엔 탈북자들을 무료로 교육해주는 곳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김석향 교수(북한학과)가 이화여대 대학원에 오라고 권유했다.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진승권 교수(사회학과)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본교에서 새롭게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본교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통일연구원의 객원 연구위원으로 재직하던 중 김혜숙 총장의 권유를 받아 본교 북한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됐다. 북한 대학에서도 교수로 일했지만 한국 대학은 사뭇 달랐다.

“북한은 대학도 학급 단위예요. 강의도 군대식이죠. 남한에선 학생들이 수업을 직접 선택하고, 심지어 먹으면서 강의를 듣잖아요. 처음엔 황당했지만 점차 이런 방식이 자유롭다고 느꼈어요. 비슷한 건 북한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면 ‘자본주의 나라처럼 돈 내면서 공부하면 이렇게 공부를 안 하겠냐’고 했는데 남한도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은 똑같더라고요.”

북한에서 사상 과목인 철학을 가르칠 땐 정부가 강의 내용을 결정했지만 지금은 모든 강의를 스스로 개발해야 한다. 또한 북한은 학생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교수가 책임을 지는 반면 한국은 학생의 성적을 개인의 문제로 여긴다. 그는 “지금은 수업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지만 강의 개설을 위해 학생들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며 “다 장단점이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본교에서 공부하는 탈북 학생들을 걱정하기도 했다. “북한과 한국의 수업 환경이 이렇게 다른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북한에서는 써본 적 없는 보고서를 한국 학생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써요. 탈북 학생들은 OMR 시험도 쳐본 적이 없을 거예요. 이해가 빠른 아이들은 1년이면 따라가지만 도중에 자퇴하는 친구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여기 왔으니 일단 독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현 교수는 본교 북한학 교수뿐만 아니라 남북하나재단의 최초 탈북민 이사로도 활동한다. 그에게는 다양한 지위에서 남북의 교류를 돕고 싶은 소망이 있다.

“사람들이 북한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요. 그러면 남북이 교류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요즘은 통일 문제에 대해 남남갈등도 심해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제가 작은 풀뿌리가 돼서 남북 발전에 기여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