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기자협회 김균미 회장(영문·88년졸) 인터뷰

한국여기자협회 김균미 회장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한국여기자협회 김균미 회장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기자 생활 30년 차. 서울신문 첫 여성 워싱턴 특파원과 편집국장. 한국여기자협회 회장이자 수석 논설위원을 거친 대기자. 화려한 수식어만큼이나 차가운 인상을 풍길 것으로 생각했던 한국여기자협회 김균미 회장(영문·88년졸)은 예상과 달리 따뜻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지난달 27일 김 회장을 서울 종로구 프레스센터 13층 여기자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저도 제가 이렇게 한 직장에서 오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좋아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 지금까지 30년 동안 한 우물을 팔 수 있었던 건 행운이죠.”

1989년 2월 김 회장이 서울신문에 입사할 당시만 해도 여성 기자의 수가 매우 적었다. 수습기자 시절 소위 ‘사스마와리’라고 하는 경찰서를 돌 때 같이 돌았던 여성 기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김 회장은 일 자체도 좋았지만, 여성으로서 그만큼 잘 버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기자 생활을 한 만큼 쌓아온 경력도 다양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부 등을 거쳐 2008년부터 서울신문 첫 여성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다. 당시 김 회장이 특파원으로 선발되자 편집국장은 우려했다. “결혼도 했고 남편은 한국에 있는데 혼자 3년 동안 타지에 있을 수 있겠느냐, 아이를 데려간다고 하자 애 키우면서 일을 할 수 있겠냐고 걱정하더라고요. 한국에서도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들었을 땐 화가 나기도 했죠.” 그때 경험을 바탕으로 김 회장은 자신도 후배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 신경 쓴다.

3년간 워싱턴 특파원을 다녀온 후에는 국제부장, 문화부장, 수석부국장을 거쳐 2016년 5월 서울신문 첫 여성 편집국장으로 선출돼 한국 여성 언론인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회장에게 있어 ‘첫 여성 편집국장’이라는 수식어는 영광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러운 말이었다.

“아직도 ‘첫 여성’과 같은 수식어를 쓰는 곳이 많지만, 점차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적합한 사람이 선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수식어로 인해 여성의 대표성을 갖는다는 부담은 덜었으면 좋겠어요. 여성에게 더 가혹한 이중 잣대도 거둬져야 하고요.”

13개월의 편집국장 임기 후 올해 5월부터는 제28대 한국여기자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여기자협회는 1961년 ‘여기자 클럽’으로 시작해, 2004년 사단법인 한국여기자협회로 출범했다. 여성 기자들이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 협회의 목적이다.

지금은 회장을 맡고 있지만 김 회장도 처음부터 협회 일을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기자가 되었을 땐 굳이 ‘여기자’들만의 모임이 왜 있어야 하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일도 바빠서 협회 일에 잘 참석하지 못하다가 선배들의 권유로 인연이 닿게 됐다.

김 회장은 당시 알고 지내던 언론계 선배들이 협회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종종 일손을 도왔다. 그렇게 발을 들이다 보니 먼저 기자 생활을 시작한 선배들의 조언이 김 회장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협회가 든든한 울타리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일을 도우며 깨달았다.

“한국여기자협회는 여성 기자가 일하며 겪는 성차별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한목소리를 내줄 수 있는 창구로 기능해왔어요. 지금은 예전보다 여성 기자 수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대부분 과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기 때문에 협회를 통해 연대하고 문제를 공유할 수 있죠.”

김 회장의 말처럼 여성 기자 수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지만, 여전히 30%도 못 넘는 언론사가 많다. 더욱이 뉴스 제작과 관련해 의사 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성 보직 간부는 거의 없는 곳이 많다.

“여성 기자의 수와 위상이 예전보다 많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뉴스룸에서의 여성 기자 현주소를 말하려면 양적, 질적인 면에서 모두 살펴봐야 해요. 2000년대 이후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며 언론사에서도 10년 차 미만 여성 기자들은 40~60% 정도로 많지만,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 입사한 여성 기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직을 맡을 수 있는 여성 인적 구조가 취약하죠.”

김 회장은 언론사 내에서 연차가 올라갈수록 여성 인력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필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남성들만이 뉴스를 선택하고 결정해 제작하는 것과 여성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기에 비단 여성 문제뿐 아니라 교육, 고용, 부동산 문제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있어 구성원이 다양해졌을 때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여성 보직 간부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영향력 있는 여성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 회장은 언제부터 언론인의 꿈을 꾸었을까. 그도 처음부터 기자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이화 재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하며 학계에 남는 것은 어떨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80년대 엄혹한 시절에 대학을 다니며 자연스레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졸업 즈음 기자에 대한 생각이 커졌다.

“작은 돌부리 하나가 물길을 바꾼다는 생각을 했어요. 엄청나게 큰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것보다도 큰 강줄기든 시냇물이든, 제가 작은 돌부리 하나가 되어 잘못된 흐름을 바꿔나가는 데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자유롭게 취재를 하고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그를 통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 김 회장을 기자의 길로 이끌었다. 그렇게 시작한 기자 생활 중 작년에는 언론계 각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상을 보인 이화 출신 언론인을 선정해 시상하는 ‘이화 언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수상소감으로 이화의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됐다고 밝힌 그에게 이화의 가르침에 관해 물었다.

“이화의 가장 큰 장점은 ‘내가 주체다’라는 생각을 배운다는 것이에요. 어떤 일이든 이화 안에서는 나 스스로 결정하고 무엇이든 주도적으로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자신감이 있었죠. 그런 생각은 언론인으로 살면서도 항상 힘이 되었어요.”

이화에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김 회장은 발은 땅에 딛고, 세상은 멀리 보는 ‘균형 잡힌 언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주변을 보며 공감하는 동시에 사회에 대해 민감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김 회장이 생각하는 좋은 기자의 모습이다.

언론인을 꿈꾸는 이화의 후배들에게 김 회장은 ‘틀에 박힌 것’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요즘 학생들은 정답을 만드는 데 익숙하지만, 정답은 없다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답을 찾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정답을 찾는 연습보다는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자기 생각을 펼칠 줄 알아야 함을 강조했다.

대학 생활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대학은 뭘 하겠다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앞으로 뭘 할지를 찾는 곳이에요.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대학 4년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 시험을 위한 공부보다는 다양한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대학 생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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