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선 기자 memober@ewhain.net

  뾰족이 올라간 눈매에 커다란 눈, 콧대도 보이지 않는 낮은 코. 예쁠 것도 없는 얼굴이지만 그림 속 ‘공주’의 표정은 한결같이 당당하고 사랑스럽다. 2004년 대중 앞에 등장해 일기장, 지갑 등 패션잡화로 우리의 일상에 녹아든 공주 캐릭터는 최근 MBC 수목 미니시리즈 ‘운명처럼 널 사랑해(운널사)’에서 배우 장나라(극 중 김미영役)의 작품으로 출연해 최근 더 주목받고 있다. 21세기 미인도를 그리는 화가 육심원(동양화‧96년졸)씨를 7일 삼청동 카페거리 근처 갤러리 에이엠에서 만났다.

  붉은 양 갈래 머리에 노랑, 파랑 별무늬 옷을 입은 캐릭터 ‘개똥이’는 드라마 운널사에 등장하면서 슈퍼스타가 됐다. 지난 8월6일~9월2일 갤러리에이엠에서 열린 육 씨의 개인 전시회에 전시된 개똥이 그림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물론 개똥이가 그려진 상품 모두 드라마에 출연한 지 일주일 만에 동났다. 갤러리 내 아트샵 진열장 한 쪽에 붙어있는 ‘개똥이 상품 드디어 입고 예정’이라는 안내판이 인기를 증명하고 있었다.

  “4년 전부터 계속 드라마 섭외가 들어왔어요. 단순히 캐릭터만 잠깐 등장하는 거였다면 거절했겠지만, 주인공이 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하니 재밌겠다 싶었죠. 공주 캐릭터 ‘개똥이’의 진짜 화가로서 드라마에 제 작품이 출연하는 걸 보면 뿌듯해 매주 챙겨봐요. 특히 8월13일 드라마에 그림이 처음 등장한 후론 갤러리 직원들이 점심, 저녁 식사도 못 챙겨 먹을 정도로 바빴어요. 덕분에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라봤네요.”

  모태 화가였을 듯한 육 씨 역시 대학 시절에는 요즘 대학생들도 흔히 고민하는 진로문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본교 동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할 뿐, 장래희망도 뚜렷이 없는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남들은 20대로 돌아가고 싶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대학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좋은 추억이 하나도 없어요.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꿈도 딱히 없었죠. 당시 전공 수업에서는 수묵 화법의 추상화를 잘 그려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는데 저는 예전부터 공주를 모티브로 인물화를 주로 그렸기 때문에 ‘전공이 나랑 안 맞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졸업 이후에도 육 씨의 늦은 사춘기는 끝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교직과목을 이수해 졸업 후 중학교 기간제 미술교사로 2년간 재직했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좋았던 육씨는 다시 정식으로 붓을 들기 위해 본교 일반대학원 동양화과로 진학했다.

  “졸업하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제게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학부 졸업 후에도 계속 방황하다 보니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들어갔었죠. 그림 그리는 것 빼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정도로 작업에 몰두했어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때 그린 그림으로 평생 먹고 사는 거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세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2002년 인사갤러리에서 열었던 첫 개인전은 현재 육심원 브랜드의 출발이 됐다. 전시를 연 한 달 동안 공주 그림이 담긴 도록이 모두 팔려 수 천부 재발행을 했을 정도로 호응을 받은 것이다. 이에 힘입은 육 씨는 전시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그림을 일상용품으로까지 확장하는 모험을 시도했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 도록을 샀다 해도 책꽂이에 꽂아버리면 다시 안 찾아보게 되잖아요. 저는 그림이 항상 보일 수 있도록 일상 공간에 놓였으면 했어요. 예를 들어 제 그림이 들어간 달력이나 일기장을 사서 일년 내내 볼 수 있게 되는 그런 장면을 꿈꿨죠.”

  이런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사업은 2005년 교보문고 입점하면서 대한민국 대표 캐릭터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브랜드의 효자상품인 일기장은 2005년 첫 판매 이래로 50만 개 이상 판매됐고 한국을 넘어 중국, 일본, 유럽 시장에도 진출했다. 교보문고에서 일기장, 앨범 등 약 70가지 일상용품으로 시작해 현재는 전국 10개 매장, 연 매출 수십억 대에 이른다. 직원 하나 없이 육씨가 상품을 하나하나 포장, 촬영하고 택배까지 보내던 10년 전에 비하면 엄청난 성장이다.

  “초기에는 택배 보낼 상자 구할 방법을 몰라 남편과 영업 끝난 서점에서 몰래 상자를 훔쳐 오기도 했어요. 처음 교보문고에 입점했을 때는 직접 매장에 나가 사람들에게 팔아보기도 했고요. 그런 작업들이 모두 너무 즐거워서 힘든 줄도 모르고 했어요.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가 아니라 ‘이런 것도 다 도움이 되겠지’라고 생각했거든요.”

  힘든 일도 즐겁게 헤쳐나가는 그의 삶의 방식은 그의 그림과 많이 닮아있다. 밝은 색감의 배경에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웃고 있는 육씨의 ‘공주’들은 바라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칭찬을 많이 받는다. 힘든 현실 속에서 자신의 그림으로 위로받는 사람들이 그가 그림을 계속 그리는 이유다. 

  “제가 그리는 여자아이들도 그렇고 이 세상에 모든 여자는 다 공주에요. 여자라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은 어떤 여자든지 모두 공주로 만들죠. 세수하고 나서 거울에 비친 예쁜 내 모습, 여자들끼리 모여 웃고 떠드는 수다 같은 작은 일상들 말이에요. 최근에도 세월호 사건 등으로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았지만 그 속에서도 제 그림이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육 씨는 전시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소장한다. 이번 전시에서 소장하고 싶은 작품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요즘 파격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노란색 파마머리, 짙은 눈화장과 붉은색 입술, 손톱이 돋보이는 공주 그림을 꼽았다. 내면에 수많은 공주를 품고 있는 화가 육심원. 그가 또 어떤 변신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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