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여성 장내 아나운서 모현희씨 인터뷰

▲ 지금은 동대문역사공원 내에 터만 남아있는 옛 동대문야구장에서 모연희씨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제공=모연희(사회·66년졸)씨

  금녀의 구역이었던 60년대 야구장 중계실에 최초 여성 장내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그 아나운서는 지금 손주 7명을 둔 70대 할머니가 됐지만 아직까지도 야구에 끊임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요즘 류현진 선수의 맹활약에 뿌듯하다는 모연희(사회·66년졸)씨를 7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장내 아나운서는 물론 관객조차 대부분이 남성이었던 1960년, 그는 당시 대한야구협회 이사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장내 아나운서 일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를 좋아했던 그는 용돈벌이도 하고 야구도 구경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당시 중구 광희동에 있던 동대문야구장에서 일을 했다. 동대문야구장은 1976년 잠실 종합경기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각종 체육대회와 국제대회가 열린 유일한 장소였다.

  미군부대 친선시합 통역부터 대학야구연맹 사무장까지, 유일한 장내 여자 아나운서로서 그의 업무는 다채로웠다. 모씨는 고등학교 시절 배운 영어로 미군부대와 친선경기가 있는 날이면 항상 선수들 옆에서 통역사 역할을 했다. 이런 그의 모습을 좋게 본 대학야구팀 감독들이 그에게 대학야구연맹 사무장직을 제안했다. 5년 동안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서울대, 육군사관학교 등 대학야구팀의 경기일정을 편성하는 일 등을 했다.

  4년 만에 ‘칼’졸업하는 동기들과 달리 그는 중계 업무를 도맡아 하느라 졸업하는데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모든 경기를 그 혼자서 중계하다보니 하루에 4경기씩 중계하는 일은 예사였다. 학교 공부와 일을 병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당시 서울에서 야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동대문운동장 하나였기에 모든 일이 그에게 주어졌다. “결석하는 날이 많아 몇몇 필수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어요. 구멍 난 학점을 간신히 메우고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딸 수 있었죠.”

  장내에 있는 선수들과도 친했던 그는 당시 그들의 훈련 환경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고 회상한다. 야구공이 귀해 공의 실밥이 터지면 선수들이 직접 꿰매 써야 했고 야구공을 얻기 위해 미군에 일부러 경기를 지는 날도 있었다. “미군부대와의 경기에서도 선수들이 항상 이기고 있다가 막판에는 일부러 져줬어요. 그러면 미군선수들이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들이 쓰던 야구장비들을 줬거든요.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한 선수들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네요.”

  야구장을 떠난 지 어언 50년이 지난 지금도 야구에 관한 그의 사랑은 여전하다. 그는 작년 12월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 입단해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류현진 선수의 열성팬이다. 얼마 전에는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삼성-두산 4차전의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50년 전 야구장을 떠난 후 다시 한 번 야구장을 밟을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관중들의 환호와 함성에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설렘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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