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올해 65세가 된 본교 교수 10명이 8월31일(월) 정년퇴임했다. 그 중 김현자 교수, 김화영 교수, 원문자 교수, 윤금희 교수, 조규화 교수는 모두 1966년에 학부과정을 졸업한 동문이기도 하다. 이대학보는 이들 다섯 교수를 만나 이화에서의 추억과 퇴임 소회를 들어봤다.

△윤금희 퇴임교수(건반악기과)

“이화는 내 몸이었고 삶이었어요. 많은 학생과 음악을 통해 영혼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2009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퇴임하는 윤금희 교수(건반악기과)가 지나온 자리는 학생들과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우수한 학생을 잘 지도하는 것도 좋지만, 정서적으로 힘들어하거나 실력에서 뒤진다고 생각해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 또한 제겐 중요한 일이었어요.”

윤 교수는 학생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레슨을 넘어 그의 ‘상담’을 받은 학생은 50명이 넘는다. 상담 대상은 레슨을 받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울음을 터뜨리던 학생, 교수실에서 자살을 시도하던 학생까지 다양했다.

“납득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것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에요. 오랜 시간을 두고 학생을 관찰해야만 그들의 마음을 읽고 지도할 수 있었죠.” 이쯤이면 학생들이 교수를 존경할 만한데, 교수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더 많이 배웠다며 손을 젓는다.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제가 배워요. 결국 제가 가르친 모든 학생들이 내게 스승이 돼주었네요.”

본교를 졸업하고 나서 교수가 되기까지, 그가 40여년을 본교 음악대학에 있으면서 기울인 노력도 다양했다. 음악관이 신축됐을 때는 음악관을 더 잘 꾸미기 위해 동창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본교의 구조개혁으로 음악대학이 예술대학으로 통합되자 학교 측에 적극 항의하기도 했다. “작년 3월 예술대학에 소속됐던 음악대학이 다시 환원됐을 때가 제 인생의 가장 기쁜 일이었고, 값진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윤 교수는 다른 퇴임교수처럼 건강관리에 힘쓰면서 후배 및 동창들에게 힘을 전해줄 계획이다. 동시에 그가 생각하는 ‘여성의 역할’을 전하고자 한다. 그는 올해 ‘강원도를 빛낸 자랑스러운 여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여성은 인간의 생명을 만들고, 사랑의 목소리로 가족의 아침을 깨우는 위대한 존재에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여성이 사회활동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엄마의 의무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지요. 이 시대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양성화를 넘어선 ‘여성다움’입니다. 퇴임 후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김현자 퇴임교수(국어국문학과)

‘이화의 길은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높다…대강당 성문길 층계에서/ 마음은 소슬히 솟구치는 새가 된다’
김현자 퇴임교수(국어국문학과)의 자작시 「이화의 오솔길」 중 일부다. 27년 6개월 간 재직한 본교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 중인 그를 8월28일(금) 인문관에서 만났다.

“이화에는 생각할 여유를 주는 아름다운 길이 몇 군데 있어요. 특히 기숙사에서 북아현문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이 참 그리울 것 같네요.” 학관 앞 비탈잔디에서 사범대까지 이어지는 울타리길 등 이화의 길들은 김 교수 연구의 쉼표이자 밑거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향을 밟는 것 같았다.

“19살에 입학한 뒤 학부 졸업은 물론 석사, 박사, 강사, 교수를 전부 이화에서 지냈어요. 처음 이화는 한 명의 작은 여자아이에서부터 시작했다죠. 은퇴를 하면서 돌이켜보니, 제가 바로 그 어린 여자아이예요.”

그는 교수로 재직 중 ‘한국시학회’, ‘기호학회’의 최초 여성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시문학계에 ‘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을 통한 ‘분석적 연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국 문화의 전통성, 여성성, 일상성을 중시하는 본교의 학풍 속에서 자유롭게 사유하며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에요. 이화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건 더 큰 행복이었고요.”

김 교수는 강단에서 시(詩)를 통해 제자들과 소통했다. 매 학기 초, 데면데면했던 학생들의 표정은 한 달이 지나면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수업 중에 시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학생들이 감동의 힘을 실감하곤 해요. 텍스트와 교감하는 거죠. 이렇게 성장해가는 제자들을 볼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10일(목) 퇴임식을 앞두고 있는 그는 종로구 구기동에 연구실을 마련했다. 지금껏 연구해온 학문을 계속하는 것은 물론, 보다 자유로운 글쓰기에 몰두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의 삶을 악장으로 치면 3악장까지라고 생각해요. 이제야 맨발로 자신의 영혼과 자유롭게 마주할 때가 온 거죠. 마지막 4악장을 완성할 글을 쓰고 싶어요. 이제 다시 걷기 시작입니다.”

△조규화 퇴임교수(의류학과)

6월3일(수) 생활관, 조예대 실습 수업의 시험이 한창이었다. 시험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을 때, 조규화 퇴임교수(의류학과)는 묵묵히 분필을 집어 들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하세요. 여러분들이 있어 저 또한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의 판서가 칠판을 가득 채우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 교수는 가슴이 울컥했다. “그게 내 마지막 수업이자 정년퇴임식이었어요. 제자들이 박수를 막 치는데, 학생들의 고민을 다 해결해주지 못하고 나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조 교수는 본교에서 일한 25년 6개월 중 겪은 가장 안타까운 일로 끊임없는 학제개편을 꼽는다. 의류학과는 2007년 학제개편에서 생활환경대학에서 예술대학으로 이전됐다가 2009년 3월 다시 조형예술대학으로 이전됐다. “그래도 우리 의류학과 아이들은 워낙 열심이라 잘 해낼 거예요. 제가 그렇게 가르치기도 했으니까요. 제 수업이 굉장히 타이트한 건 공공연한 사실이죠.”

조 교수의 카리스마는 수업 분위기를 헤치는 학생들을 단 몇 초의 침묵으로 휘어잡을 정도다. 동시에 제자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직접 프로필 엽서를 제작할 만큼 유별난 제자사랑을 자랑한다.

“제가 이화를 통해 얻은 두 가지가 있다면 ‘학자로서의 성장’과 ‘믿음’입니다. 고(故) 송태옥 전 교수님과의 인연, 이화의 채플이 자아를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됐어요.”

그는 본교 대강당에 자신과 가족들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본교에 발전기금을 내면 대강당 좌석에 기념으로 이름을 새겨주는데, 해당 좌석에 네 가족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다.

“좌석 가 2453번이에요. 힘들 때면 딸과 사위, 외손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그 자리에 가서 기도를 하곤 한답니다.”

조 교수는 8월 서초구 방배동에 아이패션(i fashion) 연구소를 설립했다. 지치지 않는 믿음으로 패션계의 큰 별이 된 그의 앞날에 은퇴란 단어는 이미 무색하다.

△김화영 퇴임교수(식품영양학과)

“이렇게 따뜻한 사랑을 받고 떠나서 영광이에요.” 8월26일(수) 오전10시, 김화영 퇴임교수(식품영양학과)는 자신의 연구실(생활관 601호)에서 지난날을 회고하며 눈가를 적셨다. “그저 고향을 떠나는 기분이에요. 정 많고 성실한 제자들, 선생님들…. 이 연구실은 제 집이나 다름없었죠.”

김 교수가 ‘집’이라고 표현한 연구실에는 이 날 커다란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석사, 박사 과정 제자들의 논문심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상은 아이들 논문심사용이었어요. 자식 같은 아이들인데 끝까지 도와줘야죠. 또 식품영양학이 이만한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학문이기도 하고요.”

김 교수는 본교 식품영양학과가 최근 이뤄진 학제개편으로 축소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식품영양학과는 2007년 학제개편에서 생활환경대학에서 건강과학대학으로 이전됐다.

“이화는 식품영양학계의 시조나 마찬가지에요. 올해로 저희 과가 80주년인데, 단과대학이 바뀌는 바람에 80주년 행사도 못했어요. 학교의 성장을 위한 구조조정이었겠지만, 마음이 많이 아팠죠.”

그래도 이화는 김 교수에게 단순한 직장이 아닌 ‘모교’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은퇴하더라도 저는 절대 이화를 떠난 게 아니에요. 어떻게 고향을 떠날 수 있겠어요? 이화는 언제나 제 곁에, 여러분 곁에 있을 겁니다.”

△원문자 퇴임교수(동양화과)

알록달록한 꽃, 나비에서 한지로 만든 작품까지, 원문자 교수(동양화과)의 그림은 30여 년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왔다.

교정을 떠나는 그의 마음은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설렌다. 화가로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마음껏 펼칠 때가 왔다는 생각에서다. “화가에게 만년(晩年)이란 그동안 갈고 닦아온 실력이 과일처럼 여물어 결실을 맺는 시기에요.”

화조화(꽃, 새, 동물 등을 주제로 그린 그림)를 주로 그리던 그는 현재 추상미술에 주력하고 있다. 퇴임 후 원 교수는 전보다 더 작품 활동에 매진할 생각이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던 열성적인 교수이기도 했다. “엄마가 된 심정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곤 했어요. 그 심정이 전해졌는지, 어떤 학생들은 내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기대기도 했지요. 그때마다 저도 공감하며 함께 고민했어요.”

화가로, 교수로 살아오는 동안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고도 당했고, 건강문제로 고생한 적도 있었다. 그림 그리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2미터 높이를 훌쩍 넘는 300호 사이즈의 그림을 그릴 때면 임시로 계단을 만들어 오르내렸다. 풀에 절인 한지와 닥종이로 6m에 달하는 액자를 손수 채우기도 했다. “공부할 때처럼, 그림 또한 온 정신을 집중해 그려야 해요. 힘들다는 점에서는 다른 어떤 힘든 일들과도 다르지 않지요.”

원 교수의 창작열은 퇴임을 앞두고 더욱 뜨거워졌다. 퇴임을 5년 남기고부터는 하루도 쉬지 않고 늦은 밤까지 붓을 움직였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그가 참여하거나 연 전시회는 300회가 넘는다.

만년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시킨 역대 화가들처럼, 그 또한 역사에 자신만의 족적을 남기려 전진 중이다. 퇴임은 이제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박현주 기자 quikson@ewhain.net
최아란 기자 sessky@ewhain.net
사진: 안은나 기자·박현주 기자
사진제공: 김현자·조규화·김화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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