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제게 아득한 고향과 같죠"
"만화는 제게 아득한 고향과 같죠"
  • 이대학보
  • 승인 200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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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광' 정재서 교수(중어중문학과) 인터뷰

 “저, 만화광 맞습니다. 만화방에서 살다시피 한 걸요. 초등학교 때는 역사 만화책 한 권을 그리기도 했는데, 전교생이 돌려가며 읽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요”
 
이번 학기 중어중문학 전공과목 ‘중국통속소설’과 주제통합형 교양과목 ‘신화적 상상력과 문화’를 가르치고 있는 정재서 교수(중어중문학과). 그가 이화에 몸담은 지도 벌써 24년째다. 스스로 자신을 ‘만화광’이라 말하는 정재서 교수는 아직도 중학생인 딸아이와 만화책을 함께 볼 정도다.
 
정 교수는 이번 학기 ‘신화적 상상력과 문화’ 첫 수업을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요괴 캐릭터들은 수백 년이나 된 일본 전통 요괴에요. 일본 문화산업이 그들의 전통문화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죠"

 이처럼 흥미로운 그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인기 강좌’로 호응이 높다. 실제로 우리 학교 커뮤니티 ‘이화이언’의 ‘비밀의 화원’에도 ‘오늘 롱코트를 입고 오셨는데 정말 가을 남자 같았다’는 등 정 교수에 대해 호감을 표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정 교수가 우리 학교 내에서만 유명한 건 아니다. 그는 1985년, 중국의 대표적 신화집인 <산해경(山海經)>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번역했다. 그는 <산해경>에 대해 “신(神)과 괴물 그림이 수록돼 만화같이 재밌는 책”이라고 설명하며, “처음엔 그런 쓸데없는 것을 연구하다가는 학자로서 대접받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도 들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정 교수가 신화를 전공하게 된 것도 만화의 힘이 컸다. “만화를 좋아해서 신화를 전공한 학자가 됐고, 결국 <산해경>을 번역하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의 대학 시절 전공은 중어중문학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대 생물학과 출신으로 우리 학교 최재천 교수(생명과학과)와 선후배 관계다.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중국문학을 복수전공하고 대학원을 중국문학과로 진학했어요. 한학자이셨던 할아버님의 영향이 컸지요” 그러나 이과생이었던 대학시절에도 그의 곁에는 항상 만화가 있었다. 글자를 막 깨친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만화와 떨어진 적이 없었다니, 그는 삶 대부분을 만화와 함께 보낸 셈이다.
 정 교수의 만화 입문기는 아득한 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어릴 적, 딱지 그림에 흥미를 느끼면서 만화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지요. 초등학교 1학년 때 본 김소년 작가의 전쟁 만화, 김산호 작가의 <라이파이>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만화로 꼽은 것은 방영진 작가의 <약동이와 영팔이>다. “불후의 명작이죠. 1960년대 작품인데 시골에서 상경한 청소년들이 서울에서 힘들게 고등학교에 다니며 순수한 사랑을 키워나가다 나중에 성공해서 고향의 모교로 돌아와 선생님이 된다는 내용이에요. 토속적인 한국인의 얼굴, 정서를 그려낸 것과 성공한 사람이 도시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고향으로 귀환해서 지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죠” 요즘 그는 <백귀야행>, <이누야샤> 등 일본 요괴 만화에 심취해있다. 그는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전업 만화작가가 있어서 그런지 만화에 만만치 않은 철학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전통문화가 잘 드러나 있다”며 특별히 이화인들에게 <백귀야행>이라는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치코 이마 작가의 <백귀야행>이 “현대의 문제성을 요괴 이야기를 통해 잘 풀어낸 수준 높은 만화”라고 덧붙였다.
 
만화책에 빠져 만화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소년은 이제 자라서 어른이 됐다. 이제는 빌린 만화책을 잃어버려 만화방 아저씨가 학교로 찾아오는 일도 없고, 부모님이 “만화를 좋아하면 깡패가 된다”고 으름장을 놓지도 않는다. 그가 코흘리개 시절부터 탐독한 만화들은 이제 강단 위에서 강의 자료로 쓰이고 있다. “신화와 만화는 글과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잃어버린 꿈을 불러일으키고, 아득한 고향 같은 느낌을 주죠” 정교수가 풀어내는 ‘만화 이야기’는 그가 만화와 오래도록 함께한 시간만큼 이화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 정재서 교수는
 1979년 서울대학교 생물학과·중문학과(부전공)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중문학 문학석사·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대 규장각 고서 해제원에서 근무했으며, 1981년 계명대 중문학과 전임강사·조교수로 재직, 1988년부터 1989년까지는 하버드 옌칭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1984년 9월에 우리 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해, 현재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출판문화상 저작상을 수상한 <불사의 신화와 사상>(1994)을 비롯, <산해경 역주>(1985), <도교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2000),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신화 1,2>(2004)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는 <동양적인 것의 슬픔>(1996)이 있다. 또한 ‘동아시아 상상력에 의해 현대의 문화와 문학을 비평’한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가 최근 출판됐다.

이채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