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학생 각자가 수고스럽게 물병을 들고다니는 상황을 바꿔보겠다며 정수기 설치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전교회장 후보가 당선됐다. 하지만 회장이 된 후 ‘학교의 재정 상태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지 않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나는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학생회 조직에 속한 뒤 타협해버리는 ‘안일함’ 때문에 목이 탔다.
17대 국회가 열리고 있는 요즘, 이같은 ‘갈증’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다. 국회에 입성하기 전과 후, 판이하게 변한 국회의원들의 태도 때문이다. 이번 17대 국회의원 대부분은 특권을 상징하는 의원전용 엘리베이터·국회의원 불체포특권 등을 없앨 것이라고 호언장담 했다.
그런데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됐음에도 개혁공약들은 이행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 의원은 ‘비행기 1등석 정도 이용가능한 권력인 줄 알았는데 기차표를 얻는 특혜 정도일 뿐’이라며 더 큰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히려 보좌진과 후원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결국 개혁을 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도 똑같이 ‘현실론’을 내세우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국회 안에는 의원들의 개혁의지는 사라진 채 의원전용 식당·사우나·엘리베이터만 굳건히 버티고 있다.
조직 밖에서는 그 조직을 비판하고 자신이 바꾸겠다며 큰 소리를 치다가도, 막상 거기에 속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합리화에 빠져버리는 것이 문제다. 개혁 의지를 가지고 조직 속으로 들어왔다면 안주해서는 안된다. 조직 안의 실상은 밖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시각과 냉철한 판단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노력할 때 비로소 의도했던 조직 개혁의 문이 보일 것이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처럼 우리는 조직이라는 상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눈과 귀를 막아버리는 습성이 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더라’·‘결국 변한게 없다’는 지적에서 자유롭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자를 걷어차는 유쾌한 도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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