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연수구 아암도 일대의 포장마차 강제 철거에 항의해 망루 위해서 농성을 벌이던 포자마차 주인(이덕인씨)이 28일(화) 해안에서 익사체로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 포장마차 강제 철거에 항의해 높이 10m의 망루위에서 동료들과 농성을 벌이다 사흘째 이후 소식이 끊겼다가 이날 숨진 채 발견됐다.

」 일간지의 사회면 말미에서 발견한 이 짧은 토막기사는 솔직히 특별히 놀랍다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흔히 있을법한 모종의 살인사건? 아니 ‘익사체’라고하는 것을 보니 망루 위해서 발을 잘못 디뎌 바다로 떨어졌나? 그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난주 금요일, 한 집회에서 본 유인물에 실려있는 현장의 시체사진과 진상내용을 경악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밧줄로 묶인 두 손, 신체 곳곳의 피멍들, 경찰에 의한 시신의 탈취와 강제부검 실시 등. 전후 정황을 고려해볼때, 정부와 청거깡패의 무자비한 철거에 항의하던 이덕인씨에게 구타와 폭력이 가해졌음이 틀립없었다.

경찰은 유족이 시신의 부검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부검을 실시하고 사인을 ‘익사’러 규정하여 언론데 왜곡보도를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4·19의 직접적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가 생각이 났다.

최루탄 파편이 박힌 처참한 시체로 이덕인씨처럼 물위헤 떠오른 그 모습이 말이다.

정권의 폭압과 독재에 의해 목숨까지 잃은 어린 학생의 비극은 억눌렸던 민중의 저항을 터뜨리는 돌출구가 되었고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공권력에 의해 민중의 생존권이 유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환경미화의 명분으로 힘없고 ‘빽’없는 자애인 노점상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으려했고 목숨을 걸고 이것을 사수하려했던 이들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

그‘힘있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누구를 위한 환경오염 방지요, 법정의인지, 도시계획인지. 요즘 떠들어 대고 있는 수출 1천억불 달성은 누구의 땀과 피로써 이루어진 것인지. 수출 1천억불의 시대, 전체 국민의 70%가 스스로 중산층이라는 위로와 집단이데올로기 속에서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과연 빈민들, 철거민들, 장애인들, 노점상들의 생존을 건 이러한 절대절명의 위기와 투쟁이 얼마나 실감있고 절박하게 다가올 수 있을지는 회의스럽다.

하지만 우리가 문민정부의 환상과 번잡한 도심의 화려함과 적당한 현실만족 속에 취해 있을 때 이렇게 비밀리에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 민중들이 존재라고 있는 것이다.

고 이덕인씨가 또 한명의 ‘열사’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것은 더이상 열사의 희생이 필요없는 사회를 희구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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