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학보사 7기 기자 전 자수문화협의회 이사장 김명임씨

고등학교의 시간표는 바둑판처럼 알아서 잘 짜여져 있다. 그러나 졸업 후 갓 입학한 대학에선 수강 시간표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해야 했다. 게다가 미술학부생이었던 나는 전공시간마다 그 자리에서 과제평가를 받아야 했기에 항상 긴장해야만 했다. 비가 오면 발이 빠지는 미끄러운 언덕을 내려와 건너야 하는 기찻길 건널목도 긴장의 연속이다.

입학한지 한 학기가 지나자 학교 입구에는 이화교가 놓이고 번듯한 교문이 세워졌다. 예술대학 내 미술학부는 미술대학으로 독립했고, 전공도 세분화되고 과 명칭도 다양하게 바뀌었다. 판자로 지은 가건물이었던 교양 강의실은 흰 칠을 한 콘크리트 학생관으로 바뀌었고 곳곳에 우후죽순 새 건물이 들어섰다. 학교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학교의 변화에 적응해가던 2학년 초였다. 지금은 미술이 일상 속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지만 그 때만 해도 미술을 한다고 하면 일상과 떨어진 조금은 별난 존재로 생각했다. 때문에 미대생은 개성이 강해서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많았다. 오기가 발동한 나는 그 말을 부정하는 한 방법으로 학보사 기자 모집에 지원하게 됐다. 이것으로 나와 이대학보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학보사에 들어온 초년의 기자들은 말수가 적은 이헌구 선생님과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는 김희선 선생님 앞에서 주눅이 들어 조심스러워했다. 그나마 팀장인 이종선 언니가 밝고 명랑해 나와 동기들은 “팀장은 왕초, 우리는 꽁초”라면서 팀장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매주 두 팀이 번갈아 만드는 신문은 왜 그리 차례가 빨리 돌아오는지. 우리 팀 신문이 나가자마자 쉴 틈도 없이 교수님에게 부탁한 원고를 챙기기에도 바빴다. 무엇보다도 부활절 새벽 예배를 준비하는 기독교학과생들과 진관 기숙사에서 하루를 보내며 부활절 새벽의 무덤을 재현했던 성극의 예배를 나의 첫 기사로 활자화했던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 후 4·19, 5·16의 사회 변혁 속에서 이대도 남자가 총장을 해야 되지 않겠냐는 주장이 나돌기도 했다. 이 문제로 열린 비상 교수회의를 취재하러 갔다가 쫓겨났던 일, ‘학교 앞 거리에 양품점이 60여개, 서점은 큰 길에 하나·중간에 작은 책방 하나 그리고 이화 서점 단 3개뿐’이라는 기사를 쓴 일, 여성 선각자 시리즈로 추계 최은희 여사를 인터뷰하려 홍파동 언덕길을 헤맸던 일이 생각난다.

녹음기가 없던 때라 취재 내용을 기록하느라 쩔쩔맸던 적도 있고 대한극장과 아카데미극장 시사회에 초대받고 처음으로 영화평을 써보기도 했다. 바다에 대한 음악과 문학 미술에 대한 여름 특집을 쓰느라 외국서적과 헌 책방을 뒤지던 일, 서대문 동아출판에서 토요일 밤 늦게 교정을 끝내고 인쇄소에 넘긴 뒤 오후11시 마지막 전차를 놓칠 새라 발을 동동거리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학보사에서의 1년 반은 강의실에서 뵐 수 없던 선생님들과의 만남을 통해 여러가지를 체험할 수 있게 해줬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경험하게 해줬기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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