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8일(월)은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날이다.

또한 올해는 명성황후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요즘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사건으로 전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가공할만한 테러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 가장 참혹했던 경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이 사건은 왕비에 대한 테러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유린하고 조선인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은 유래를 찾아보기 드문 무자비한 만행이었다.

106년전인 1895년 10월8일 새벽5시경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시로 서울에 주둔한 일본수비대·일본공사관원·영사·경찰·신문기자·낭인배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워버렸던 것이다.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주한영국공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해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했다…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 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흉도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리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했다…그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근처 후원의 소나무 숲으로 옮겨가 나뭇단에 등유를 부은 뒤 시신을 불태웠다.

남은 것이라고는 뼈 몇마디 뿐이었다…’라고 생생히 기술돼 있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인끼리의 충돌이라고 날조하며 사건의 은폐공작에 들어갔다.

왕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꾸며 고종이 서명하지 않은 폐서인조칙을 내리게 하고 왕과 대신들을 협박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 서양인 외교관들에게 폭로돼 해외 신문에 보도되면서 버티기 어려워지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와 관계 범죄자들을 소환해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고 수사하는 척하더니 몇 달 후 무죄방면했으며 그들이 동경에 도착하자 일본 천황은 오히려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한마디로 일본 정부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만행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왜 명성황후를 시해했을까. 명성황후 민비는 조선왕조 역대 왕비 중 가장 정치적 감각과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아 16세에 한 살 아래인 고종의 왕비로 간택됐다.

처음에는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자 왕의 정치적 반려자로 다가가기 위해 여러 방면의 지식을 쌓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고종이 필요로 하는 정치참모로서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제공해 왕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 대원군의 정치적 야망과 고종의 친정 의지의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구조 속에서, 자칫 야기될 부자간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정치적 방파제 역할을 하면서 희생물이 됐다.

아울러 정치적 경륜을 쌓아가면서 당시 열강에 의한 침략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가장 영토적·정치적 야욕을 불태우고 있는 일본의 실체를 미리 간파해 철저한 반일주의자로서 저항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정한론의 제1단계로 1876년 조선의 개항을 강제적으로 완수하고, 제2단계로 조선에 기득권을 갖고 있던 청나라를 한반도에서 밀어내기 위한 작전으로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로 이끌어 내면서 조선에 독점체제를 구축하자, 명성황후는 친러반일정책을 강화해 이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일본은 정한론 3단계 작전인 한반도 식민지화에 최대의 장애물로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국가적 모든 책략을 총동원해 시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식민지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부정적으로 일관하는데 주력했다.

시해 이후 이에 분노하여 항거하는 항일 의병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열화와 같이 일어났다.

이는 을사조약 이후 대대적인 의병전쟁으로 계승됐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시해당한지 10년 후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던 개화기 명성황후의 정치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역사적 사건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유형의 일들이 재현되고 있음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봐왔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군국주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의 나라 국모도 시해하고 역사도 마음대로 왜곡했다.

우리 역사는 남이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한다.

이제 우리는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정신적·현실적 대처능력을 키워 우리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당당히 남겨줄 수 있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배용 교수(사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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