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전9시 아침 수영반의 유일한 청소년이다. 유난히도 더운 날들이 이어졌던 작년 여름, 동네 시립청소년센터의 수영 아침반을 등록했다. 시립청소년센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수영반의 8할은 할머니들, 남은 2할은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유일한 청소년인 내가 차지하고 있다. 수강생의 평균연령이 70세쯤 될 것 같은 공간의 유일한 청소년이 나라는 사실에 기분이 묘하다. 우리나라가 초고령화 사회에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수영장에서 깨닫게 된다.

초등학교 때 배운 자유형과 배영 복습을 끝마치고 평영 진도를 막 나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나와 같은 반의 초급반 할머니께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이는 어떻게 되냐, 어디에 사냐,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아침마다 수영을 나오는 거냐, 젊은 사람들이 원래 더 빨리 배우는 법이다, 아까 보니 자유형 자세가 예쁘더라 등등.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적당히 대답했다. 대학생인데 학교 가기 전에 시간이 남아서 수영 배워요. 일부 질문은 나의 정보를 남에게 너무 많이 알리는 것 같아 적당한 말로 뭉뚱그려 둘러대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같은 셔틀버스를 타는 할머니께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초급반 할머니의 질문과 비슷했다. 나이, 집, 고향, 학교, 젊었을 때 운동하는 게 좋다 등등. 이번에도 적당히 무례하지 않게, 나름의 방어기제를 세운 채 대답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대화를 끝냈겠지만, 할머니들은 한번 시작한 대화는 쉽게 끝내지 않는다. 15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할머니의 말들이 나에게 쏟아졌다.

그 후로도 수영에 나가는 날이면 셔틀 할머니의 “오늘 날씨가 어떻네요”로 시작해서 “운동 재밌게 해요”로 끝나는 말들과 초급반 할머니의 “앞 순서에서 돌아”로 시작해서 “역시 젊으니까 금방 배우네”로 끝나는 말들이 하나의 루틴처럼 이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을 열지 못한 채로 적당한 대답과 추임새만 남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독한 감기와 중간고사 기간이 겹쳐 꽤 오랫동안 수영 수업을 나가지 못했다. 중간고사를 끝내고 수영 수업에 나갔던 날, 나를 보자마자 셔틀 할머니께서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오랫동안 안 나와서 그만둔 줄 알았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보통 같았다면 또 적당한 말로 무마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험 기간 동안 친구들과 수다 떨 시간이 없었기 때문인지, 혼자 아팠던 것이 서러워서 그랬던 것인지 그날은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감기에 심하게 걸렸기도 하고 시험 기간이라 바빴어요.” 수영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는 초급반 할머니가 똑같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파서 못 나왔던 거 아닌지 많이 걱정했어.” 그 말을 듣고는 울컥했다. 일주일에 겨우 3번 보는 나의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감사했다.

그 후로 마음을 활짝 열게 됐다. 아주 살갑진 못하지만 나름 최선의 공감 능력을 발휘해 할머니들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단순히 안부를 묻는 사이를 넘어서 ‘요새 날씨가 어떤지, 근처 마트의 세일 품목은 어떠한지, 요즘 고민은 뭔지’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이따금 할머니들의 휴대폰 설정을 바꿔드리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이다. 한국에만 있다는 ‘정’ 문화도 이제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 옆집과 윗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한 사람이 나의 이웃사촌인지 오늘 처음 방문한 외부인인지 알아내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물론 나 역시 혼자서 살아남는 개인주의 사회에 익숙해져 있었다. 더군다나 나고 자란 곳도 아닌 서울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에서 덜컥 대학 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혼자라는 사실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동물은 절대로 혼자 살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혼자 병원으로 향할 때, 슬프고 화나는 일을 수화기 너머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때, 사소한 안부 인사와 걱정을 나눌 사람이 없을 때, 혼자라는 것이 서럽기도 했다. 아직도 ‘혼자라서 서러울 때’가 있긴 하지만 나의 안부를 묻고 걱정을 나누는 수영장 할머니들 덕분에 더 이상 서울살이가 외롭지 않다.

실은, 3월 수영 수강 신청에 실패해 수영장 할머니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스물하나의 나를 키운 것은, 나를 더 단단해지게 만든 것은 수영장 할머니들이다. 다음 수강 신청은 기필코 성공해 나의 스물둘도 수영장 할머니들과 함께할 수 있기를. 할머니들을 만나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와르르 쏟아낼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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