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꺼낸 할머니의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를 들고 있는 뮤지컬 속 제시. 제공=네버엔딩플레이
'제시의 일기'를 들고 있는 뮤지컬 속 제시. 제공=네버엔딩플레이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읽고 난 후에는 그 가족 모두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애정 어린 육아일기가 여기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 부부인 최선화(문과·31년졸)씨와 양우조씨의 일기다.

일기에는 부부의 서툰 육아 이야기와 중일 전쟁 당시 임시 정부 요원들의 일상이 담겨있다. 1946년까지 작성된 일기는 2023년 8월29일 뮤지컬을 통해 새롭게 되살아났다. 이 뮤지컬은 최씨의 손녀 김현주(교육심리·94년졸)씨가 정리·편집한 책 ‘제시의 일기(1999)’를 원작으로 한다. 뮤지컬 ‘제시의 일기’는 10월 29일(일)까지 서울시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3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부부의 공유 일기에서 뮤지컬로 재탄생하기까지

육아 일기를 작성한 최씨는 이화여전 졸업 후 본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선배였던 김합라 교수의 주선으로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잠시 귀국한 양씨를 만난다. 이후, 최씨는 상해로 돌아간 양씨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가 추구하는 신념 하나만을 바라보며 결혼을 결심한다. 양씨와 결혼을 약속한 최씨는 이후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 ‘통행증’을 얻기 위해 상해간호전문학교 입학증을 받고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서 다시 만난 둘은 1937년 김구 선생의 주례로 결혼한다. 1938년 7월19일, 부부는 중일 전쟁 중 일본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태어난지 보름이 지난 딸을 데리고 기약 없는 피난을 시작했다. 양씨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피난 생활 속에서도 독립 후 고국에서 국제적으로 뻗어나갈 첫딸의 이름을 ‘제시’로 지었다.

1938년 제시의 탄생으로 시작된 육아일기는 1946년 해방 이후 귀국까지 이어진다. 일기는 양제시(영문·60년졸)씨의 딸인 김씨에게 전달됐다. 최씨는 첫 아이를 임신한 손녀 김씨에게 한번 읽어보라며 본인의 육아 일기를 건넸고, 김씨는 이를 책으로 편집해 1999년 출간했다. 임시 정부 소속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상을 면밀히 그려냈고 신념에 따라 고난을 택한 부부의 모습을 통해 문헌적 가치와 헌신적인 삶의 교훈을 알아본 것이다.

책 ‘제시의 일기’를 무대로 옮기려는 시도는 이번 뮤지컬 제작 전에도 있었다. 책을 처음 접했던 2005년부터 뮤지컬로 제작하려 했던 국민대 이혜경 교수(공연예술학부)가 2010년 하반기 공연을 목표로 추진했으나 재정을 비롯한 여러 문제로 불발됐다. 이를 계기로 뮤지컬 업계에서 유명해진 ‘제시의 일기’는 2023년 제작사 네버엔딩플레이(N.E.P Contents)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

뮤지컬 ‘제시의일기’는 성인 제시가 비 오는 날 낡은 일기를 펼치며 시작된다. 일기 속에서는 어린 부부의 좌충우돌 육아일기가 펼쳐진다. 극에서는 독립운동가보다 서툰 부모로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제시 캔 두잇’이라는 넘버에서 “눈치 보지 말고 꿈 꾸고 마음껏 사랑해”라는 가사를 통해 딸을 향한 어린 부부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책 ‘제시의 일기’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넘버도 있다. 넘버 ‘유언’은 “돌 위의 또 작은 돌”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우리 위에 쌓인 작은 돌멩이 위 수많은 인생들”이라며 “무너지지 않도록 가지런히 쌓아 단단하게 버 티고 반듯하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같은 임시 정부 소속으로 상해 시절을 함께한 동료 이동녕 선생을 기리는 내용이다.

뮤지컬 '제시의 일기' 배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양제니씨. 제공=네버엔딩플레이
뮤지컬 '제시의 일기' 배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양제니씨. 제공=네버엔딩플레이

배우들의 열연을 본 제시의 동생 양제경씨(약학·63년졸)는 “오늘은 참 기쁜 날이다”며 “아빠, 엄마, 언니를 모두 만났다”고 말했다. 무대가 끝나자 꽉 채워진 관객석에서는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연극을 공부하고 싶다던 최씨의 이야기인지라 더욱 의미 있는 박수다.

 

이야기가 아닌 실제 삶을 살펴보면

김씨는 “할머니는 본인 관리에 철저하시며 빈틈없던 분”이라고 칭했다. 그는 “일기를 읽고난 후 할머니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씨와 양씨는 본인들이 험난한 생활을 택한 이유를 아이들이 납득하길 바라며 일기를 작성했다. 양씨는 “고생스런 시절을 지내고 있는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된 다음에 중국생활의 의미를 어떻게 지니게 될까”라며 “이 아이 들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일기에 썼다.

그 정신은 후대에 그대로 전해졌다. 최씨의 손녀인 김씨는 미국에 사는 한인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고자 노력해왔다. 김 씨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지역 미국 공립학교 교육구의 선출직 교육위원으로 재직중이다. 책 ‘제시의 일기’를 출간한 후인 1999년, 미국으로 간 김씨는 미국인 작가 요코 가와시마 왓킷슨씨가 쓴 ‘요코 이야기’(1986)로 많은 한인 교포 아이들이 고통받는다는 기사를 접했다. ‘요코 이야기’는 일제 말 한국인이 일본인을 강간하고 학대했다는 거짓서술을 담은 소설로 당시 미국중학교에서 역사 참고서로 사용됐다. 이에 분노한 그는 ‘한국 역사·문화 교육 위원회’를 만들어 한국 역사수업을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캘리포니아주 교육청에 이 교재의 완전한 퇴출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김씨의 행동은 많은 한인들의 서명을 이끌어내며 ‘요코 이야기’는 추천 도서에서 제외됐다.

김씨는 “제시의 일기를 출간하며 내가 배운 것은 공동체를 위한 소명 의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임시 정부 소속으로 공동체를 위해 움직이셨던 것처럼, 한인 교포 모두가 공동체를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고 말했다.

양제경씨도 마찬가지다. 양제경씨는 어머니 최씨에 대해 “처음엔 참 바보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고 평했다.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던 최씨는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가기 전부터 연극 공부를 위한 미국 유학이 예정돼 있었다. 그는 90이 넘은 최씨에게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최씨는 “나는 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왜 고생을 사서 하셨을까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일기를 제대로 읽은 후에는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을 갖게 됐다” 고 말했다.

 

3대에 걸쳐 퍼지는 이화의 가치

제니의 졸업식에서 찍은 세 모녀의 사진. 왼쪽부터 최선화씨, 양제니씨, 양제시씨. 제공='제시의 일기' 우리나비
제니의 졸업식에서 찍은 세 모녀의 사진. 왼쪽부터 최선화씨, 양제니씨, 양제시씨. 제공='제시의 일기' 우리나비

이화여전 선배의 주선으로 시작된 이 가족에게 본교의 의미는 남다르다. 양제경씨는 “이화는 나를 키워준 곳”이라며 이화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나타냈다. 해방 후 귀국한 최씨는 영문과 교수로 다시 복귀했다. 두 딸 양제시씨와 양제경씨도 본교에 입학했다. 세 모녀가 함께 학교를 다니던 시절, 양제경씨는 “약학대학 실험실(현 약학관 A동)에서 수업을 듣고 있으면, 본관에 계신 어머니의 사무실이 보였다”며 “수업을 듣다 우리 엄마 계시나 보곤 했다”고 말했다.

1930년 이화여전 재학 당시 영어 연극 '아이반호'에 출연한 최선화씨(오른쪽에서 5번째). 제공=이화역사관
1930년 이화여전 재학 당시 영어 연극 '아이반호'에 출연한 최선화씨(오른쪽에서 5번째). 제공=이화역사관

최씨의 두 딸에 이어 손녀인 김씨가 본교에 입학하자 가족들은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김씨는 심리극 학회인 ‘이화 사이코 드라마’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할머니도 영문과 재학 당시 연극을 했고, 어머니도 연극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며 “소극장에서 매년 공연을 올리면서 (연극을 좋아하는 것이)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고 말했다.

양제경씨는 뮤지컬로 제작된 ‘제시의 일기’ 에서 후배들이 최씨의 세 가지 모습에 집중하길 바랐다. 그는 어머니 최씨를 설명하며 “많은 이들이 어머니가 워낙 고학력자고 여러 활동을 하다보니 집안일을 안 했을거라 예상하 지만 언제나 본인이 먹을 밥은 본인이 만들어야 한다고 교육했다”고 말했다. 양제경씨는 약 20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매일 밤 강의 준비를 했던 교육자 최씨, 일제 시대 지성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최씨도 언급했다. 양제경씨는“이 세 측면에서 어머니의 인생을 바라보고 배워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씨는 ‘회복탄력성(resilience)’라는 영어 단어를 소개했다. 그는 “(뮤지컬을 통해) 어떠한 도전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본인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 이화인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시의 일기’라는 가족 이야기 속에 담긴 독립운동의 사명을 강조했다. 그는 "내 일상 속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며 "이화인들도 이러한 공동체 정신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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