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마주하는 절반의 여성들은 거울 아래서 눈을 반짝이거나 때로는 이마를 찌푸리는 거울 속의 그녀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들이 잠들면 또 다른 절반을 위해 거울은 다시 빛을 반사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란 말로 미인에 대한 열병을 설득하기엔 여성만이 유독 그 대상이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중요한 건 내적인 아름다움이다"란 말 역시 미인의 꼬리표에 따라다니는 현실적인 혜택 앞에선 위선으로 전략한다.

어머니도 페미니스트도 그리고 갓 세상에 몸뚱이를 내놓은 아기조차도 자유롭지 않다.

넋을 잃고 외적인 아름다움에 권력을 쥐어줘 온 일은 매일의 일상에서부터 역사의 페이지마다 넘치고 넘쳐왔다.

특히 여성의 미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마력과 집착은 가부장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되고 웃지못할 사건들을 전하지만, 여성의 지위가 여전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졌다고 할 수 있는 현대에서도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의 외모에 대한 집착에 대해 그동안 "여성의 사회진출이 제한된 상황에서 대리적인 권력이라도 맛보기 위해 아름다움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석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비교적 활발해진 지금에도 외모에 대한 열망이 사그러 들기는 커녕 더욱 광범위 하게 보편화되는 것에 대해선 "근대성"이라는 또다른 해석으로 접근한다.

푸코는 인간의 몸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는 근대로 넘어오면서 권력은 세련된 경로를 통해 개인들과 그들의 육체, 몸짓 그리고 일상행위에 접근한다고 한다.

몸은 일상의 관습들과 대규모 권력조직의 연결고리 그 자체로, 해체도니 권력은 개인의 신체에 가장 먼저 재현된다.

여성들은 이런 얼굴, 이런 몸, 이런 행동거지의 여자가 예쁘다란 미인의 거푸집에 들어맞도록 자신의 몸을 다듬으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간다.

철학과 김경희 강사는 "여자들의 몸이 어떤식으로 가꾸어 지길 요구하는가를 통해 그 안에 어떤 사회적인 억압이 녹아 있는지 읽어야 한다"고 한다.

미인에 대한 광기가 보편화되는 것과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맞물려 일어났다는 것은, 가시적으로 나마 붕괴된 듯이 보이는 가부장의 권위가 그네들의 몸 안에서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결과적으로 여성의 몸은 그 선택권을 쥐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몸은 의식과는 역설적으로 기존의 가치관을 재생산하게 된다.

미인의 기준이 상류층 그리고 서구 백인에 맞춰지는 욕망의 방향을 따라가면 미에 대한 열망 그 연장에서 지배권력에 대한 헤게모니로 자연히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미인의 홍수"는 세상이 변해도, 해방을 외칠 이유가 사라져 가는 바로 그 순간에도 억압의 존재는 얼굴을 바꾼 채 살아남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안티미스코리아 기획자 박미라씨는 "몸에 습관처럼 밴 권력은 본능만큼이나 자연스럽고 페미니스트조차 쉽게 벗어나지 못할만큼 어렵고 막강한 문제"라고 말한다.

개인의 욕망을 통해 권력이 재생산된다는 것이 미인데 대한 갈망을 설명하는 하나였다면 또 다른 하나는 이미지 시대에 시선이 차지하는 독점적인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미인에 대한 열망은 점점 뚜렷해져 왔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지에 의한 세련된 통제가 이뤄진다.

산업발전으로 인구가 모이고 인구가 모인 공간은 "도시"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해 왔다.

도시의 번잡함을 이해하는데 그것이 가로수건 쇼핑몰이건 시각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지리학자 커스텐 시몬스는 말한다.

집약적인 소비를 끌어내 오도록 발전된 도시는 시각적인 미끼들을 던져주고, 르네상스 이후 지배해 온 "눈의 경험"을 신뢰하는 근대 서양의 사고방식은 현대문화를 시각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비쥬얼 아트와 맥스 미디어가 현대의 문화를 이끌어 오면서 "도시"라는 현대적 공간은 "거울로 도배된 방"으로 꾸며져 왔다.

거리를 나다닐 수 있었던 "관찰자" 그리고 "소비자"들은 남성들이 주를 이뤘고 여성 특히 여성의 몸은 남성들이 주를 이뤘고, 여성 특히 여성의 몸은 관찰되는 객체로 자리잡는다.

시각적인 시선은 그 자체가 이미 남성들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보는 것이 지배를 획득하면서 "여성의 아름다움"은 "도시"라는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 되고 있다.

그리고 시각의 지배는 이제 남성들에게도 앵글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시각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시각 그 자체에 뿌리내린 남성성은 모든 여성을 미인대회의 무대위에서 끌어 올리고 도시자체를 미인대회의 화려한 세트로 꾸며왔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문제시 되는 점은 아름다움 그리고 여성의 외모에 대한 문제가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로만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의 몸은 신의 영역에서 개개인의 관리의 문제로 옮겨져 왔다.

몸 관리는 또 하나의 능력으로 여겨지며 외모에 대한 차별은 당연시 돼 왔다.

아름다움에 강박적 집착을 보이는 여성들은 스스로를 우울증 등의 "병"으로 자인하며 울타리를 쳤다.

또 성형수술은 자기만족으로, 그리고 다이어트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한정지은 채. 개인의 문제로 축소된 몸뚱이에선 권력도 억압도 사라지고 개인의 "히스테리"와 "집착"만이 남는다.

여성의 외모는 이제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선택의 문제였던 적 조차 없었다.

이제 거울과의 외로운 싸움을 마치고 사회와의 전면전을 선포한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