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진관 스님

시청이나 국회 앞에 스님 한 분이 목탁이 아닌 피켓을 들고 있다.

먹색 승복차림에 굵은 염주를 목에 걸고 시위하는 곳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인 진관스님을 만났다.

진관스님은 사형제 폐지·양심수 후원 등 20년 남짓 인권운동에 몸담아 왔다.

요즘은 ‘불교인권위원회 용산주한미군아파트 저지 대책위원장’을 맡아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미대사관·통일광장·용산미군기지 정문 앞 등을 순회하면서 용산주한미군아파트 건립저지를 위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가 주한미군 반대에 열심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분단이라는 상황 때문이야. 분단은 외세 때문이고 외세는 곧 ‘양키’지.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바로서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양키들을 몰아내야 하는 거야.” 진관스님이 한적한 산 속 대신 북적이는 ‘거리 속에서의 수행’을 택한 계기는 7∼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0월 유신·광주민주항쟁 등 군부정권이 자행한 독재와 폭정을 직접 목격하게 됐지. 이런 어두운 상황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기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해서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뛰어든 사회운동. 그를 키운 건 팔할이 ‘운동’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억압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문사 진상규명·양심수 석방운동 등 소외된 이들의 인권을 위해 싸웠고 90년 11월에는 불교인권위원회를 세웠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 때는 감옥에 갇힌 1천4백여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날마다 편지 쓰고 책도 보내줬었지”라며 그들이 석방된 후 찾아와 은혜를 잊지 못할거라고 고마워한 것을 기억에 남는 일로 꼽는다.

위안부할머니 문제를 최초로 공론화시킨 데도 진관스님의 공이 크다.

역사를 바로 세우고 짓밟힌 그들의 인권을 되찾아 주기 위해 90년부터 모금운동에 나섰고 그 결과 92년 6월 서교동에 그들을 위한 ‘나눔의 집’을 짓게 된 것이다.

많은 활동을 하면서 국가기밀누설죄 등으로 구속과 석방을 수십번 반복하며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지만 진관스님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인권운동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 자비행(慈悲行)을 행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협지의 주인공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활동 외에도 진관스님은 시를 통해 인권을 노래한다.

“감옥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수감돼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76년부터 쓰기 시작했지. 나에게 시는 곧 양심과 같아.” 문학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고 믿는 그는 요즘 ‘염화미소’라는 불교연극 제작에 한창이다.

끊어진 불교연극의 맥을 잇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조금이나마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주기 위해서다.

“힘들긴, 나보다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큰 영광이지.”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주저않고 자신을 던지는 진관스님. 오늘도 명동성당·종로거리 등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향하는 ‘임꺽정 스님’의 발걸음은 바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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