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파전, 민주떡볶이, 자주순대 팔아요. 양도 많으니 모자라면 더 달라고 하세요” 지난 23일(수) 오후, 서울대 학생회관 앞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장터에는 목소리 큰 할머니의 인심 좋은 입담이 울려퍼졌다.

“이리 와서 이것들 좀 먹어봐. 막걸리도 가져가고” 장터의 ‘총 지휘자’격인 임기란 어머니(민가협 회장)는 친자식 보듯 기자에게 먹거리를 살뜰하게 챙겨주신다.

투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88년부터 시작한 민가협 장터는 올해로 15번째. “그때는 연탄불에 밀가루 한포대 갖다놓고 장터를 열었지” 지금은 그래도 버젓한 천막이라도 있어 다행이지만 작년보다 손님이 많이 없어 걱정이라고. 임기란 어머니는 86년부터 민가협에서 활동한 초창기 멤버다.

서울대 83학번인 막내 아들이 85년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 연수원을 점거하다 경찰에 잡혀간 것이 계기가 됐다.

“박종철이를 죽인 보안대한테 아들이 고문당했어. 그놈들이 우리 아들을 욕조에 몇 번이나 집어 던졌다는구만” 다행히 아들이 6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당시에는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며 이제 어머니는 그 때를 담담히 반추한다.

“그 시절? 말도 마. 길을 다니는 학생들도 무조건 다 잡아가고… 빨갱이 죄목을 덮어씌워 포승줄도 빨간색이었지”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했던 과거보단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양심수와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아들, 딸같은 젊은이들이 감옥가고 수배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바로 이것이 어머니가 72세인 지금껏 민가협 활동을 접지 않은 이유다.

호흡 곤란, 퇴행성 관절염, 중풍 등으로 ‘온 몸이 병덩어리’지만 그래도 나와서 싸우러 다니면 몸 아픈 것도 잊어버린다는데. “수술받고 나서 몸도 채 추스리지 않고 활동하러 나오는 사람도 있는데 뭘” 그런 분들을 보며 더 힘을 얻는다는 임기란 어머니는 집회, 토론회, 기자회견, 추모제 등으로 여느 직장인들보다 더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파고다 공원에서 벌이는 목요집회는 93년 9월 양심수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연 것이 그 시작이었다.

처음 목요집회 할 때는 사람들의 반응이 정말 냉담했다고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면 파고다 공원 노인들이 ‘나라 망하게 한다’며 한소리씩 하곤 했지” 그때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시민들의 이해가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처음 집회에서 구호 외치는게 부끄럽진 않았냐는 질문에 “아, 그동안 경찰한테 수도 없이 맞고 방패에 찍히고 그랬는데 그런게 뭐 대수겠어”라며 당연해한다.

이렇게 사방팔방 뛰어다니다가도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나 온 힘을 다해 싸웠지만 어이없는 결과가 나올때는 너무 속이 상한다는 임기란 어머니. 특히 얼마 전 ‘힘없는’ 인권법이 통과됐을 땐 정말 허무했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92년의 대전교도소 투쟁은 어머니의 기억 속에 ‘승리’로 기분좋게 남아있다.

불만거리 시정을 요청한 재소자들을 구타한 교도관들에 항의해 교도소 밖에서 15일 동안 싸워서 이긴 투쟁이란다.

처음엔 뭣모르고 싸웠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걸 알고 더 열심히 하게됐다는 임기란 어머니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사람대접 받으며 사는 것’이다.

“성경에 이웃의 어려움을 내 일같이 도와주라는 말이 있어”라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일하고 싶단다.

운동을 체계적으로 다듬어주는 간사들도 참 고맙다며 장터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하는 채은아 간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전날에도 비가 와서 음식을 많이 팔지 못했다며 갑자기 흐려지는 하늘을 보고 “또 비오면 안되는데…”하며 장터 걱정을 하신다.

‘슬픔’, ‘박해’, ‘수난’을 상징하는 어머니의 ‘진보랏빛’ 수건이 아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닦아내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이주영 기자 nanna82@ewha.ac.kr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