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해... 국적,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

" - 근로기준법 제5조 "균등처우"에 관한 내용 - 개인의 출신, 인종 등을 떠나 실질적 노동을 제공하는 이들은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음에도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힘겹다.

작년에 연수생으로 입국해 전자업체에서 일했던 중국인 왕씨.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꿈을 안고 고국땅을 밟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하루 10시간 이상씩을 뼈빠지게 일했지만 제 때 월급이 돌아오기는 커녕 심한 욕설과 폭행, 인간적 모멸감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 새로 일하게 된 곳에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5개월 간 밀린 임금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오히려 업주에게서 "불법체류자로 신고하겠다"는 협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잘못했다"며 빌어야 했다.

그 동안 한국에 오기 위해 소개비 명목 등으로 쓴 돈이 중국에서도 평생 모으기 힘든 액수인 5백만원에 이른단다.

빌린 돈과 이자 갚는 것도 막막하다며 한 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에서 일그러진 우리 노동시장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했다.

현재 국내 외국인 근로자들은 약26만명정도로(00년 8월, 법무부 통계) 대부분이 3D직종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91년 단순 생산직과 제조업 분야의 인력난 해소를 목적으로 도입됐던 " 산업연수생제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래 연수생제도는 상대적으로 기술이 덜 발달된 나라에 기술이전을 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값싼 외국인력 이용을 형식적으로 위장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실제 노동자와 다름없이 일하거나 더 많은 일을 하는 "연수생"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여러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대부분 연수생의 임금수준이 일반 노동자에 비해 낮아 이들은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상 위험을 무릅쓰고도 사업체를 이탈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는 전체 외국인 노동자 중 약64%가 불법체류자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외국인 노동자의 집" 전도사 허광씨는 "불법 체류자는 작업 중 재해를 당하더라도 노동자로 인정되는 등 오히려 연수생보다 처지가 낫다"며 "합법보다 불법이 더 조장될 수 밖에 없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흔히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폭언.폭행 등 인권침해와 임금체불 등의 문제에서도 이들은 신분이 "불법"이라는 약점 때문에 제대로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한 예로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불법 체류자는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다가오자 피를 흘리며 도망간 일도 있다.

게다가 연수생 이탈을 막기 위해 감금, 신분증 압수, 임금 체불 등 비인간적인 방법들이 가해진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현대판 노예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 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최근 "고용허가제"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의 지위를 "연수생"에서 "조동자"로 바꾸는 것을 기본 골자로 한 고용허가제는 통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증가한 불법체류자들을 양성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2002년 1월 시행을 앞둔 이 제도에 대해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중소기업청 등은 임금상승과 노사관계 불안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즉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 외국인 노동자 임금을 국내 노동자 수준으로 올려줘야하고 이들이 노조설립 등을 할 경우 집단행동도 우려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반박하는 측은 현재도 외국인 평균임금이 국내 노동자의 약 80%에 이른 상태이고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숙식. 외국인 노동생산성을 감안하면 더 이상의 큰 임금 상승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오히려 이들은 고용허가제가 갖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며 노동허가를 받은 노동자가 고용주와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게 하는 "노동허가제"를 궁극적 해결방안으로 제시한다.

노동인권회관 부소장 석원정씨는 "고용허가제는 직업선택.이동의 자유가 없고 해고를 당할 경우 14일내에 출국해야 하는 등 예속적인 측면이 남아 있다"며 결국에는 이보다 한 단계 발전된 형태인 노동허가제 시행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두 제도의 차이에 대해 "허가의 주체가 고용허가제는 고용주, 노동허가제는 노동자 중심인 점"이라고 설명한 "외국인 노동자 대책협의회(외노협)"간사 이란주씨도 현 상황에서 고용허가제는 그나마 차선책일 뿐 앞으로 많은 보완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원칙없이 무분별하게 이뤄진 인력도입정책과 잘못된 의식구조가 만들어낸 외국인 노동자 문제. "인력 도입은 산업정책과 맞물려 생각해야 하는 문제인 만큼 변화 과정에서 사양산업은 과감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한 석원정씨는 고부가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면 임금은 낮을 수 밖에 없다며 "궁여지책으로 저임금의 외국인을 고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했다.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3D직종의 인력난이 여전히 심한 우리 현실에서 외국인력 도입을 피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합법적 통로를 열어주고 정당한 대접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단지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멸시하고 억압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