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끌어온 보스니아 내전 - 그 성격과 해결전망

91년 발발이후 지금까지만 해도 2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보스니아 내전을 바라보며 21일(화) 조인된 보스니아 내전의 평화협정에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인류최대의 비극이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눈에 서방의 적극적인 개입하에 진행되는 평화협정에 한가닥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라예보를 취재하고 돌아온 중앙일보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보스니아 시민은 “여전히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평화는 말뿐인데 우리가 흥분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며 협정에 그다지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92년과 올해 봄 두차례에 걸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협정은 아무도 지키지 않는 휴지조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에 가서명된 평화협정도 이슬람-크로아티아 연합이 보스니아 영토의 51%를 차지하도록 하고 세르비아계가 나머지를 차지하기로 해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평화협정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가능성이 희박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전쟁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흔히 언론에서 지적하듯 보스니아 내전으 ‘사악한 세르비아계’가‘선한 보스니아’를 공격했기 때문도, 혹은 이슬람·크로아티아·세르비아민족간의 전통적인 갈등 때문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유고는 나찌 독일의 점령에서 독립한 이후 6개의 공화국이 아무런 분쟁없이 지내왔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도 크로아티아·세르비아·이슬람 회교도 세 민족이 각각 인구비례에 맞게 기득권을 행사하며 ‘평화롭게’공존해 왔다.

특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언어도 공통적으로 쓰는 등 이들 사이의 민족적 차이는 별반 두드러지지 않았다.

사실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하게 된 근본 원인은 유고의 정치·경제적 위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유고는 소위 ‘시장사회주의’의 대명사로 불리는 경제체제를 운영해 왔다.

당시 소련과 냉전관계에 있었던 서방은 유고를 시장의 장점을 가장 잘 살린 국가로 선전, 대규모의 투자를 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유고는 일정한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엄청난 외채부담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70년대 두차례의 오일쇼크와 80년대 세계경제의 불황은 유고정치·경제에 깊은 그늘을 던졌다.

1988년에서 1989년 사이 극심한 인플레는 최고 2천5백%까지 치닫는 등 경제위기가 엄습했고, 이는 정치적 위기로 이어져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파업과 시위가 연이었다.

위기에 직면한 정치가들은 그때부터 자국내 소수민족을 겨냥한 민족주의 선동으로 위기를 타개해 보려고 시도했다.

세르비아의 지도자 밀로세비치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유고에서 경제·정치적으로 가장 억압받는 집단인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하면서 “세르비아의 형제 자매여, 코소보를 공격하러 가자”고 선동하기까지 했다.

자국의 경제·정치적 위기를 민족감정을 통해 타개해 나가고자 했던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두 지도자는 91년 3월 25일 보스니아를 점령해 나누어 갖자는 비밀협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해결책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곧바로 크로아티아의 투지만은 마치 히틀러가 자국민의 단결을 위해 민족주의 논리를 내세우며 유태인을 학살했던 것처럼 크로아티아내에서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을 대대적으로 축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세르비아는 연방군을 보내 크로아티아내의 세르비아의 반발을 지지하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5년에 가까운 전쟁으로 유고의 경제는 회생불능의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전쟁의 발발 원인인 경제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서방의 개입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실제로 투지만이나 밀로세비치같은 유고의 지도자들은 자국 대중들이 벌이는 반전 시위과 파업에도 직면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1991년에는 베오그라드에서 50만명에 이르는 대중시위가 일어났고 이 결과로 반전행동센타가 설립되어 대중들의 활동을 조직화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불만또한 극에 달한 상태로 8월만해도 세르비아 산업의 10%가 파업의 물결에 휘말렸다는 수치는 이를 뒷받침해 준다.

군대내의 탈영도 증가해서 1993년 가을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군사법정은 2천5백명의 탈영병이 있다고 보고했다.

전쟁이 이들의 불만을 해소해 주지 못한 상태에서 섣부른 협정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는 아마 그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UN도 이미 그러한 사실을 짐작하는 듯, 평화협정이 채결되자마자 다국적군 6만명을 투입한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고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문서’나 다국적군의 군대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와 생필품이라는 것을 간과한다면 평화는 또다시 정치지도자들만의 평화로만 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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