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인이 느끼는 도시의 고독

97년 홍콩 본토 반환에 대한 홍콩인들의 암울한 심리상태를 새로운 영상언어로 표현해낸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은 전통 무협영화의 형식을 빌려온 사랑이야기이다.

4명의 남자와, 4명의 여자, 모두 8명의 스타급 연기자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화려함이 넘쳐 현란하기까지하다.

특정한 규칙에 매달리지 않는 이야기전개와 등장인물들의 등·퇴장 그리고 빠른 편집과 화려한 색채, 비장한 음악 등은 다른 홍콩영화처럼 과격한 액션과 적당한 볼거리, 코믹함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겐 낯설게 보이겠지만, ‘동사서독’의 파격이 주는 예술적 성취는 여느 유럽영화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줄곧 ‘서독’구양봉(장국영)의 나레이션을 축으로 진행된다.

그러면서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만나고 헤어진다.

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황갈색톤의 색조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청색톤의 색이 장중한 음악과 함께 어우러지며 간간히 고속 촬영에 의한 느린 움직임의 결투가 삽입된다.

그러면서 등장인물들은 알듯 모를 듯한 묵직한 대사를 내뱉는다.

강호에서 살아가는 무사들이 느끼는 인생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또는 세상에 대해서 발언을 하는 것이다.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지는 이 대사들은 마치 공허한 시구절 같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냉소같기도 하다.

그것은 왕가위감독 특유의 감각적 대사들이며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간직하지만, 쉽게 토해내지 못하고 마는 말들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 왕가위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관객과 호흡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독과 동사, 황약사(양가휘)를 축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줄거리는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식으로 진행되지만, 그것들은 하나로 엮어져 이야기를 이루며, 모든 관계들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서야 어렴풋이 드러난다.

동사와 맹무살수(양조위) 그리고 흥칠(장학우)은 강호의 무사들이고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임청하, 유가령, 장만옥, 양채니 등도 사랑과 복수듣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왕가위는 이들 사이를 친절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섞여있으며, 이야기는 규칙없이 전개된다.

등장인물의 성격들도 확실히 보여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던지는 묵직한 무게의 대사에서 서로의 관계와 인생의 깊이를 관객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왕가위 감독은 88년 ‘열혈남아’로 데뷔하여 개봉 예정에 있는 ‘타락천사’까지 모두 다섯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결코 많지 않은 영화로 그는 세계가 주목하는 감각과 주제의식을 겸비한 신세대 씨네아티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먼저 만들어졌지만 늦게 개봉된 ‘동사서독’은 사랑의 좌절과 삶에 대한 허무가 짙게 베여있다.

또한 그것을 논리적인 이야기로 풀어내기 보다는 심오한 대사와 유려한 화면의 처리로 보여주는 왕가위의 영상 감각이 뛰어나다.

중국의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한 무사들의 비장함과 마적떼와의 혈투 그리고 계속되는 음모등은 마치 서부극 속의 총잡이 인디안과의 쫓고 쫓기는 대결과도 같다.

‘동사서독’은 줄곧 홍콩의 도시적 감수성을 자신의 영화적 소재로 다루던 왕가위 감독의 첫 무협영화여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도시에서 벌어지는 무료하고 고독한 일상과 다르지 않다.

왕가위는 무협 영화를 통해 전통적인 홍콩 영화를 재해석함과 동시에 헐리우드의 서부극을 교묘히 패러디하며 자신의 독특한 멜로 드라마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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