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희곡, 불모지 한국에 상륙

우리시대의 여성은 능력만 갖추면 남성과 똑같이 직업전선에서 일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남성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고의 위치까지도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남성들이 독차지했던 의사, 판사, 교수, 사장 등의 자리를 여성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이렇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직업 체제가 마련된다면, 그리고 여성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뚫리게 되었다면, 여성은 이제 비록 제한된 범의내에서긴 하지만 그간 꿈꾸어 왔던 자유와 해방을 다소 획득한 것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해 형국의 현대 여성 극작가 카릴 처칠(1939~ )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성공한 직업여성이 되는 일이 결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최상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이서 직업여성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카릴 처칠은「최상의 직업여성들」(1982)에서 분명히 밝힌다.

‘최상의 직업여성들’은 성공한 직업여성 말린 승진 축하파티로 시작된다.

하짐나 이 파티의 손님으로 초대된 시공을 초월한 여성 저명인사들(빅토리아 시대 여행가 버드, 13세기 일본황제의 애첩 니조, 9세기 남장하여 교황의 자리까지 올랐던 죠안, 희생의 대가로 후작과 결혼하게 된 그리셀다…)이 털어놓는 시련과 극복이라는 삶의 여정은 축하 파티의 분위리를 암울하게 퇴색시키고 만다.

이 과거 저명인사들의 환상적 재현은 여성들이 그간 겪어온 억압의 역사적 무게를 느끼게 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성공한 여성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피상적일 뿐 여성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아무런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지 못함을 시사해 준다.

말린은 직업소개소의 최고경영자의 위치까지 도달하기 위해 모성, 형제애, 효심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거부해야만 했다.

딸 앤지를 하층계급에 속하는 언니에게 맡긴 채 비정한 경쟁 사회의 선두자로 나섰던 말린은 그간 남성들이 여성들을 희생시키며 사용해온 자본주의·가부장제의 가치관과 억압기제를 그대로 수용했던 셈이다.

남성들이 출세를 위해 여성들을 자녀 양육과 가사노동의 올가미에 씌웠듯이, 말린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언니 죠이스에게 앤지의 양육과 가사노동을 감수하도록 했다.

처칠은 이 극에서 자칫 자립을 성취한 듯 여겨질 수 있는 말린을, 최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가정과 자신이 속한 계층을 내버린 이기적인 속물주의자로, 심하게는 여성의 착취자로 통렬히 비판한다.

‘최상의 직업여성들’이외에도 카릴 처칠을 얼마전 우리 나라에서 공연된 「클라우드 나인」(1979)을 비롯하여 아직 번역이나 공연으로 소개되지 않은 「도둑고양리 비니가르탐」(1976) 「늪지」(1983) 「새들이 입에 한 가득」(1986) 등 걸작으로 꼽히는 여성극을 여러 편 썼다.

처칠은 여성 운동의 발전과 함께 찬성될 여성 극단인 ‘모스트러스 레지먼트 극단’과 사회문제 분석에 관심을 둔 ‘조인트 스탁 극단’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자신의 페미니스트적 시야를 확대하고 역사적 관점을 심화시켰으며, 또 실험극의 방법-한 배우가 여러 역할을 맡거나 성 역할을 전도하는 방법-을 시도하여 그간 소설이나 시에 비해 페미니즘의 논의가 무척 미약했던 연극분야를 활성화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캐릴 처칠 외에도 1060년 후반 이후 수많은 여성 극작가들이 영국과 미국에 등장하여, 계속 적극적인 극작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여성 소설가와 여성 시인의 등장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극작가의 대량 배출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하지만 여성 극작가들은 다른 장르의 여성 작가들에게 제공될 수 없는 배우의 신체와 무대라는 물적 공간을 활용하여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을 보다 효과적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여성운동과의 직접 교류 속에서 싹트고 꽃을 피우게된 여성극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여성운동의 슬로건을 사장 충실하게 입증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소설이나 시의 독자들이 개인의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문제와 대면하고 해결의 방향을 찾는다면, 극을 관람하는 관객은 극작가 개인의 창조력과 극장이라는 공동의 장이 제공하는 종합적인 비젼을 한꺼번에 즐기게 되며, 이러한 가운데 여성 경험의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최상의 직업여성들’외에도 출판사 예니에서는 세계여성극 명작선 시리즈로 마리아 아이린 포네스의 「진흙」 팜 젠슨의「삐아프」등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다.

이러한 여성 극작가들의 작품들은 그 주제의 폭에 있어서 다양성을 내보이고 있지만 모두 변화하는 자아 개념에 근거해 세계의 변화를 촉구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외국 여성극에 대한 소개가 매우 부족하고 여성극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 6명의 영국과 미국의 여성 극작가들을 소개한 예니 출판사의 시도는 여성 소설이나 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여성 문제에 대한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시각을 소개하여 우리의 여성 논의에 대한 시각을 확장시켜 주는 의미있는 일이다.

희곡 작품의 소개는 또한 공연의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여는 일이기에 더욱 뜻깊은 일이다.

한 작품이 공연될 때 그 작품의 문화적, 사회적 파급효과는 다른 장르의 그 효과를 훨씬 능가하게 되며, 작품에서 제기된 문제는 우리 사회 공동의 문제로 확대되어져 함께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가능해질 수 있게 된다.

앞으로도 이런 여성희곡들이 계속 발간되어 우리가 여성문제에 대한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다른 여성 극작가들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특히 다양한 여성문제들(마녀문제, 동성애 문제, 여성의 광기와 폭력문제)을 철저히 분석하고 있는 처칠의 다른 여성극들도 속히 번역되어 우리의 여성문제에 관한 통찰이 심화되고 그 논의의 폭이 확장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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