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울적할 때, 서점에 가 책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막혔던 마음이 풀어져 할 일을 챙겨서 돌아올 때가 많다.

오늘도 서점에 갔다가, 아동문학가로서 아이들을 바르고 참된 사람으로 키우는 일과 우리 말 바로 쓰기 운동을 해오다 2003년에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의 『나무처럼 산처럼』(도서출판 산처럼)을 보았다.

그 책에서 선생님께서는 "자연을 몰라도 돈벌이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정치를,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하늘을 보는 마음으로, 무슨 학문이고 철학이고 예술이고 문학이고 떠벌리면서 거짓과 속임수로 살지 말고, 저 풀숲에서 우는 벌레만큼 고운 울림으로 자연 속에 어울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라고 하신다.

이런 구절을 읽다가 이대에서 강연을 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1984년, 4·19 기념식 행사 이후, 노동절행사(5월1일), 구국 기도회와 學園에 상주하여 조사 활동을 하는 경찰에 대한 문제와 학원 자율화에 대한 열망,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 되버린 80년 광주사태의 진상규명 등 학생들의 학내외 민주화 요구로 시작된 봄은 연일 많은 행사가 있었고, 봄꽃의 향기보다 최루탄 냄새가 끊이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1984년5월7일 이대학보766호, 『민주화 요구로 시작된 5월』기사참조) 그런 상황 속에서 이오덕 선생님은 사회 민주화에 대한 큰 목소리의 외침이 아닌 『아동문학의 빈곤』이라는 강연을 하셨다.

(이대학보 766호 6면 참고) 그 글에는 아이들의 삶이 바로 詩라고 말하시고 아이들의 삶과 문제를 잡지 못하여 절실함이 담기지 않은 글을 지적하신다.

선생님은 혀짤배기 소리를 흉내내어 그런 것을 동심이라고 미화하는 것, 감각적인 말의 기교에 별난 재주를 부리고 싶어하는 작가들의 글을 비판하셨다.

문학작품도 시장에서 책으로 팔려 독자들에게 가는 상품의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문학작품이 상품이 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일상의 용품과는 다른 것이며 작가는 장사꾼과 달라야 함을 역설하셨다.

인간정신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동문학, 그에 대한 깨달음과 긍지가 있는 작가, 희생적인 노력을 감수할 수 있는 교사, 그 중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바른 언론을 펴 나갈 수 있는 當時의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많은 학생들이 모인 장소는 아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진행하셨고, 강연이 끝난 후에는 강연에 참석한 학생들이 낸 질의 메모를 일일이 검토하시고 그에 맞는 답변을 빼놓지 않고 해 주셨었다.

한 평생 어린이다운 순수한 마음을 소중히 키워나가 앞날에도 늘 희망을 가지라고 소망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을 본 것은 벌써 이십 년이 훌쩍 지났고, 선생님께서는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다른 어떤 꽃보다도 참꽃이 온 산을 물들여 피는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 살고 싶다"고 말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오늘 우리의 곁에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대학은 단순한 기능적인 지식 문화를 전수하는 등가교환의 場이 아니고 개인의 희망을 일구어나가는데 힘이 되야 한다며, 역사의 강물에 대한 인식을 일깨어 주셨던 여러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여러 선생님의 모든 수업을 들고 마주 앉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학생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놓으셨던 여러 선생님이 기억이 난다.

1980년 5월 17일을 전후로 해직되었던 김치수 교수(불어불문학 전공), 백명희 교수(교육학 전공), 백재봉교수(법학 전공), 서광선 교수(철학 전공), 이효재 교수(사회학 전공), 현영학 교수(기독교학 전공)님은 만 4년 만에 1984년 9월에 학교에 돌아오셨다.

학교를 떠나있던 여러 선생님의 심정과 고충을 우리로선 알지 못하였지만 당시 학교로 돌아온 교수님들의 수업을 듣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기대와 설렘으로 수강신청을 하고 교과목 등록이 되지 못한 학생들은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던 때였기에 선생님의 銜字만으로도 이대생으로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1984년7월16일 이대학보772호, 7면 참조) 이 뿐만 아니라 84년에 학교에 입학한 후 다음 해에 학교를 떠났다가 90년대에 다시 학교에 돌아와 지금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참으로 잊혀지지 않는 많은 선생님을 어찌 일일이 다 쓸 수 있으랴! 뵐 적마다 배고픈 학생이라고 끌고 가 밥을 사주시던 선생님도 잊을 수 없고, 여러 선배·친구·후배들이 때로는 나의 선생이 되기도 했다.

학교의 나무와 풀과 바람도 나의 선생이 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어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아는 만큼 느낀다"고, 여러 선생님의 가르침도 느낀대로 알고, 아는 만큼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고가는 바쁜 일상에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놓치고, 잊어버리고, 또 얼마나 꾸지람을 듣는지 모른다.

오늘 이오덕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을 우러러 보면서 내 스스로 어떤 학생인지 돌아본다.

하지만 우러러 보는 여러 선생님의 그늘 속에서 자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 입맛에 맞는 것만 찾아 참된 진실을 저버리고 있는 못난 학생이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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