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쪽 팔로 팔베게를 하고 나머지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액정에 8시 50분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일단 학교에 가겠노라고 대답을 해 두었으니 그 말은 지켜야 했다.

늦게라도 오라고 했지만 물론 빨리 올수록 좋다는 전제는 선명했다.

어젯밤에 친구들을 볼 생각, 지원이를 만날 생각에 잠을 설쳤다.

기대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뒤척임이 밤을 채웠고, 그 결과는 아침이면 늘상 있는 미열이 좀 더 심해졌다는 것이었다.

이불 속에는 권태로운 온기가 감돌았다.

그래도 결심만 한다면 지금 당장 잠을 청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진호만 아니라면 그 쪽이 나의 자명한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제안 혹은 의견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내용들의 거의 대부분 내가 원하는 것들과는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었지만 또한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과 들어맞는 것이기도 했다.

진호는 현재를 향한 내 삶의 타협점, 그 점의 이정표였다.

이 점이 실제적인 차원에서 내 쪽이 진호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나가는 이유라 할 수 있었다.

그와의 사이에 먼저 이런 현실 논리, 즉 나의 현실 회피의 욕망을 조금이라도 조절하게 해 준다는 점을 먼저 내세운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와 내가 친구라는 외피를 걸친 사이라는 점이 나 스스로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우정처럼 정서적 유대가 기반이 되는 관계에 대해 논리적인 설득을 시도하려 한다는 점은 ,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내가 친구가 된 이유를 따져묻고 싶은 내 자신이 웬지 집요하게 느껴져서 질려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느끼기에 진호와 나에게는 우정이라 하기에는 정서적 친밀감의 공백이 너무 컸다.

그 대신 서로에 대한 배려의 선은 분명하게 그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의도한 바가 컸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다른 종류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에게는 오롯이 현실을 향한 시선과 그로부터 비롯한 에너지가 있었다.

현재를 위해서만 쏟아지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기는 그 자체가 나를 향한 억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대부분 그 기는 나에게 그가 낯선 경계의 대상으로 놓여있게 했다.

무엇보다도 나와 확인히 구분되는 점은 그의 지극히 실용적인 취향이었다.

그에게 나는 과거의 영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철부지로 보였을 것이다.

음악과 영화, 그림 등 미적인 것에 대한 취미는 적어도 나에게는 물과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향기처럼 늘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작 내가 견디지 못하고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은 그런 취미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런 쪽의 취미를 가꾸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허영과 얄팍한 자존심으로 그들에게는 분명 지루하게 느껴질 재즈나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들었가. 전시회장 앞에서 파는 소책자를 구입하는 것에 관람자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느끼고, 정작 전시물 하나 하나에 찬찬히 시선을 주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진호와 같은 사람들보다 나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진호의 배려와 실제적 도움과는 다른, 진심으로 정서적 친밀감을 향한 유대는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을 꺼낸 영화에 대해 빤한 수준의 동의를 표하다가 어이없을 정도의 지적 바닥을 드러내는 경우, 그들은 내 환멸과 증오를 면키 어려웠다.

비록 지적 바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동의와 공감이 인위적인지의 여부는 판별하기 쉬웠다.

그들은 단지 취미일 뿐인 영역에 대해 지식을 뽐내려 들었고 그것을 가지고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을 서열하화려 들었다.

그런 점들 때문에 난 오히려 진호와 같은 편에 더 끌렸다.

진호는 자신이 문화적 취미에 문외한이고 관심도 없는 편이라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스스럼없이 인정했다.

그렇다고 그가 내 취미에 대해 대단함이나 부러움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도리어 내 쪽을 향한 경멸마저 섞어 있었다.

농담 조로 말했지만 자신은 한순간의 재가 되고, 때묻은 과거가 될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며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곤 했다.

우리가 서로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더라면 이런 이질적인 부분이 당연히 마찰을 일으켰을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괴로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을 나와 동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취할 만큼 서로 가까워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늘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있을 정도의 가까움과 딱 그만큼만을 허용하는 거리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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