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와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얼마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나는 속으로 그 실마리를 찾은 것에 쾌재를 불렀다.

진호는 과거의 풍족했던 시절에서 현재를 견디게 하는 자존심을 얻고 있었다.

그는 몸은 현재에 있고, 지금을 살아내고 있을지라도 마음과 꿈만은 예전의 기억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식물에 구멍 뚫린 상자를 씌워 놓으면 그 줄기가 햇빛이 들어오는 구멍을 향해 자라듯 말이다.

그 결과 식물은 전반적인 모양에서는 한쪽으로 휘어진 기형이 된다.

그러나 본인은 그 기형을 과거로부터 비롯한 자존심으로 잘 인식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좌로 삼으려 했다.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몰락에 걸쳐 있는 사람이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은 비굴함이거나 오만함이었다.

안락하기만 한 과거와 달리 거친 현실에 그나마 주어진 조건에서 물질적 안정을 추구하려는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비굴이었다.

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던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물질적 몰락을 이겨내기 위해서인지 오히려 더 자존심을 꼿꼿이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오만함이었고, 진호가 선택한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날카로운 자존심은 현실과의 접점으로부터 그만큼 상처받기 쉬웠다.

그 상처가 나에게는 과거를 품고 조개처럼 닫혀있던 그 애를 열어 볼 틈이 되어 주었다.

진호가 울 때 뒤에 앉아있던 나는 말없이 휴지를 건네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재수없다고 소리지르고 욕을 할 때, 난 그렇게 했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말없이 옆을 지키고 힘을 주면서도 그 상처 자체에 대해서는 무심한 척 행동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법이다.

그 애가 과거에 젖어 산다는 점이 상처의 근원이고, 따라서 현실을 직시하고 열린 마음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터이다.

그러나 때로는 잡초의 뿌리 끝까지 캐내기보다는 해마다 윗부분만을 손질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보다 손쉬운 방법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진호가 현실에 제대로 발을 들이는 문제보다는 그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 만큼의 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접근하기는 쉬웠다.

그럼에도 친해지는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눈물 닦을 휴지를 건네는 사람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진호와 점심시간에 밥을 함께 먹으며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하였고, 그 애의 배경에 대해 보다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진호가 전학을 와서 듣지 못했던 우리 학교 수업의 앞 부분을 정리해 주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거의 나가지 않는 진호에게 농구를 같이 하자고 하며 시합에 넣어주기도 했다.

난 그에게 현실과 최소한 접촉하면서도 그 현실로부터 오는 괴로움을 위로해 줄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런 존재가, 현재 진호가 현재로부터 자신을 조금 떨어뜨려놓은 상태에 새롭게 맺은 관계들 중 가장 우정과 흡사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의아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의아함을 느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내가 작위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진호에게 굳이 접근한 이유와 이런 식의 접근이 나의 다른 관계에서도 적용되느냐의 문제가 그것이다.

두 번째 질문부터 먼저 답하자면, 나에게는 내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을 파악하고 그 사람에 맞는 단계를 설정하여 접근하고 친해지는 일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내 무의식은 나에게 궁극적으로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의 문제에 매우 민감하였다.

나에게 올 이해의 정도에 따라 내가 보다 친해져야 할 사람 혹은 그저 얼굴만 알고 지낼 사람 등의 구분이 이루어졌다.

이 논리라면 진호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라느 의미겠는데 객관적인 조건으로는 내가 그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손해 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억울한 부분이 있기는 했다.

내가 그에게 주는 이익이 노력에 의한 것이라면, 진호가 나에게 주는 이익은 그의 타고난 매력이 함께있는 나도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반사이익의 차원에서였다.

외모만 본다면 나도 나쁘지 않은 경우에 속했다.

어떤 텔런트를 닮았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고 키가 크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반면 진호는 쌍꺼풀에 짙은 눈썹을 지닌 나와는 다른 느낌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애는 저음의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가졌고 잘 웃지는 않았지만 흰 피부에 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애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외모 때문에 열등의식을 느끼며 살지는 않았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사람들은 그저 잘생긴 사람을 찾고, 애착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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