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에서 여성학을 강의하다 보면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화에서 여성학을 배우면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긴 해요.” 라고 하는 학생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화의 학생들이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아마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려면 소리 높여 주장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이 아직 페미니스트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고민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머뭇거림에는 우리 사회가 페미니스트에 대해 갖고 있는 비틀린 시선도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남성은 나에게 “당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므로, 페미니스트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다.

페미니스트는 담배를 피울 수도 있고, 피우지 않을 수도 있다.

남자를 증오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고집이 센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페미니스트 안에도 다양한 생각들이 있다.

어쩌면 다양한 입장, 특히 약자의 입장을 가장 잘 고려하고 배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페미니스트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차별의 원인, 그 차별을 폐지하기 위한 방법, 지금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성별에 따른 차별과 억압을 인식하고 폐지하기를 원하고 노력한다면, 그는 페미니스트인 것이다.

그런데도 페미니스트를 아주 좁게 정의하는 것, 그것은 페미니즘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시선인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사이엔가 어떤 ‘이즘’, 어떤 ‘이스트’가 되길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아무런 입장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편하고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입장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조차도 하나의 입장일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 곳에도 발 딛지 않으려 하면, 진공상태로 떠 있을 것 같지만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어느 곳에, 어떤 곳을 향해 서 있다.

푸르른 5월에 나는 5월 같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싶다.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 피하지 말고 바라보라고. 다른 소리들에도 귀 기울여보라고. 그리고 표현하라고. 오늘의 내 생각에 진심으로 충실하라고. 오늘 내가 그렇게 소리 높여 주장하고 내일 내가 생각을 바꿀지라도…. 오늘 주장하지 않으면 내일의 바뀐 생각도 없을 테니까. 이화의 학우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어디에 어떤 곳을 향해 서 있을 것인가? 어떤 세상을 만들기를 원하는가? 어떤 세상을 열어갈 것인가? 이 사회 속에서 성 차별을 느끼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바뀌길 원한다면 자신 있게 말해보자.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 더 알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고 실천해 나갈 것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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