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스웨덴에 다녀왔다. 코로나19가 악명 높던 시기였지만 운 좋게 해외취재 프로그램에 선발됐고, 그렇게 취재차 스웨덴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유명 대학도시, 웁살라(Uppsala). 낮고 오래된 건물이 아름답던 도시에서 우리는 총 학생 부회장부터 교환학생 코디네이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학생자치 조직에 대한 취재를 진행하던 터라 한국과 스웨덴 학생문화의 전반적 차이, 그리고 이에 얽힌 그들의 에피소드들을 잔뜩 들을 수 있었는데, 우습게도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느낀 가장 큰 차이는 ‘나이’였다. 나이? 7544km나 떨어진 세계 최대 복지국가에 가서느낀 게 겨우 나이라니. 별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생각을 곱씹을수록 중요성은 분명해졌다.나이는 한국에서 가장 견고하고 보편적인 인생의 로드맵이기 때문이다.

‘나이’에 대한 인식이 가장 커지는 순간은 바로 대학교 1학년, 한국에서 매우 상징적인 그 시기다. 모두가 대학을 갈 것이라 예상하는 속에서 1학년들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찬란하고 아름다운 스무 살’의 기대를 충족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나에게, 교수들은 으레 “졸업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어리숙한 말투의 새내기 게시글에는 심심찮게 “귀엽다”는 말이 붙곤 했다. ‘밥 약’할 새내기 구인글을 보며, 내가 저 사람보다 나이가 만약 많은 상황이라면 저 사람은 여전히 나에게 밥을 사줄까?”라는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

학년이 올라가니 비주류성에 대한 인식은 약해졌지만, 불안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챙김의 대상’에서 1년만에 선배가 된 나는, 끝없이 펼쳐지는 레이스에 참여 중이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 동기들은 학점을 챙겼고 방학에는 공모전과 동아리를 했다. 그들은 동아리가 얼추 끝나는 3학년에는 교환학생을 다녀오기도 하고 휴학을 하며 인턴을 하기도 한다. 관련 캠프에 참가하고 수상실적을 만든다. 쉴 때도 그냥은 쉬지 말아야 한다. 매 순간이 콘텐츠가 되고 매 활동이 자기 PR 요소로 자리 잡는다. 내 인생의 차별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위해 달리고 몰두하고 열중한다.

분명히 멋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끊임없이 달리는 평균적으로 두 살 어린 ‘또래’를 보며 깊은 불안에 빠진다. ‘나이의 로드맵’에서 분명 2년이나 앞섰지만 그들조차도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불안하다. 한 번도 내 나이가 많다 느끼지 않았대도 나를 채용하는 사람들의 관점까지는 알 수 없다. “이 나이 먹도록 뭘 했냐” 는 질문에 할 말이 그다지 많지 않은 사람들을, 세상이 어떻게 대우할지 얼추 알기에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안감은 끊이지 않는다. 학기를 이어가지만, 집중은 되지 않고, 집중은 되지 않지만 완전히 선로를 이탈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휴학은 할 수 없다. 병도 아닌, 정상도 아닌, 무언가의 상태. 나이의 기준 아래 나는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감정이 새롭지도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 오래됐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데도 해결되지 못했다. ‘스펙 전쟁’ 따위로 압축당한 청년들의 불행은 단순히 우리가 무한 경쟁시대에 던져진 존재라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모두가 견디는 것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버티지 못해 생겨나는 일이 아니다. 사회는 세상에 자신의 미래를 숨 가쁘게 준비하는 사람밖에 없다고 알려줬다. 현실을 포기해야지만 미래의성공 ‘확률’을 올릴 수 있기에 우리는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가르친것은 나의 경험이 아닌 이 사회다.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이에 도달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제시하지 못한 채 청년들이 불안에 떨게 만들고, 비움의 시간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게만든 이 사회가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스웨덴에 가서야 알게 됐다. 열흘 남짓,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취재를 하며 내 삶의 수많은 반례를 맞닥뜨렸다. 나는 이런 삶이 가능한지 몰랐다. 불안에 떨며 내 4년을 빡빡히 그리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입시를 위해 보낸 2년이 뒤처짐의 요인이 될까 내 나이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몰랐다. 30대가 될 때까지 대학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보며, 대학에 합격한 이후 의도적으로 갭 이어(gap year)를 갖는 그들을 보며 헛웃음만 나왔다. 최소한 내가 배운 세상에서는, 이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쉴 수 있는 권리, 내 삶이 망가질까 봐 불안에 빠지지 않을 권리. 1년, 또는 반년단위로 짜인 촘촘한 사회의 권고기준에서 벗어나 다른 길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불안할 필요가 없다. 불안해야 할 것은, 청년에게 이 정도 수준밖에 제시하지 못한 이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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