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불온적인 말이다. 권리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니. 철학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을 넘어서고 있는 현대 사조를 거스르는 말일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비롯해 소수자성에 집중하는 세계 전반의 트렌드와도 맞지 않는다. 어쩌면, 흐름에 뒤떨어지는 수준을 넘어 파시스트적인 말이 될지도 모른다.

다름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왜 시대에 역행하는 듯한 말을 던지냐고 묻는다면 나는 으레 롯데리아 '어썸버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2020년, 롯데리아가 내놓은 신메뉴 스위트 어스 어썸 버거(Sweet Earth Awesome Burger)는 콩고기 햄버거다. 대체육을 주메뉴로 선정한 대기업의 변화와 시도가 반가웠기에 햄버거를 잘 즐기지 않는 나임에도 주변 친구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곤 했고, 덜한 죄책감에 비해 맛이 뛰어나 점심 메뉴를 고를 수 있는 날이면 롯데리아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어썸 버거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 두툼한 패티가, 네슬레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딜레마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네슬레는 스위스 식품기업으로 극심했던 빈부격차를 해소하려던 칠레 아옌데 대통령의 개혁을 의도적으로 좌절시켰다. 공격적인 분유 마케팅을 통해 제3세계 기아 문제 심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줬다고 평가받는다. 네슬레가 콩고기 패티의 제작자라면 일반 버거 대신 어썸 버거를 고른 나의 선택은 윤리적인가? 환경을 위한 선택이 인권 친화적이지 못한 대기업의 지지로 이어진다면 내 선택에 내포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윤리적 소비의 '윤리'가 허용하는 범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졌고 결국 고민의 방향은 위 제목으로 돌아가게 된다. 모두가 동등하게 중요하고 소중하다 외치는 권리의 세계에서도 우선순위가 존재할 수 있는가?

어썸 버거를 통해 그 일각이 드러났지만, 가치 소비의 딜레마는 이미 시작돼있었다. 상충하는 가치는 '네슬레'와 '대체육'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동과 여성의 관점에서 롯데와 롯데리아는 논란이 다분하다. 2018년, 롯데백화점이 여성 직원을 향한 수직적 직종 분리 및 이를 통한 임금 차별을 행사하고 있다는 고발성 기사가 나왔다. 2021년, 롯데리아가 배달비 이중수령을 통해 폭리를 취한다며 규탄하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어썸 버거까지 가기 이전, 롯데리아라는 선택 자체가 완전히 윤리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햄버거 프랜차이즈는 무결한가? 맥도날드, 버거킹, 파파이스 등 외국계 기업이 한국에서 구형한 노동지형도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다. 환경, 아동, 노동, 여성… 결국 그래프의 축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딜레마 또한 늘어난다. 겨우 네슬레와 대체육만의 상충이 아니다. 거대한 두 아니 여러 세계의 충돌이 어썸 버거를 비롯한 모든 물건 안에 내재해있다. 조금의 일반화를 덧붙이자면, 이 세상의 모든 인권과 가치는 상충하는 것이다. 윤리적 소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윤리적 소비에 대한 비교적 무거운 위 선언은 이것도 저것도 필요 없으니 다 하지 말자는 불가지론적 회의론이 아니다. 모든 것이 충돌하는 세상 속 내 선택이 가진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자는 청유다. 명확한 상하 관계 없이 가치가 혼재되는 현실 속, 개인의 선택은 결국 우선순위를 내포한다. 다시 어썸버거로 돌아가, 네슬레가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롯데가 의도적으로 여성을 차별했던 기업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썸 버거를 구매하는 개인이 있다. 그에게 대체육을 향한 시도는 여타 가치들을 압도할 만큼 중요한 가치 값을 갖는다. 반대의 선택도 존재할 수 있다. 어썸 버거를 통해 반환경적 행위에 저항할 수 있는 대체육 시장을 대중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네슬레와 롯데라는 기업의 이전 행보에 대한 반감으로 불매하는 개인의 선택이 있다. 이는 여성과 노동을 더 중요한 가치로 만든다. 개인에 따라 어떤 가치에 더 큰 중요도를 매기냐는 달라질 수 있지만, 암묵적으로 권리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천부인권의 시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생각돼왔던 권리의 절대적 동등함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권리는 결국 현실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동등하지만 동등할 수 없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권리, 더 시급하게 여겨지는 권리의 자리에 무엇을 놓을 것인지 여러 개의 우선순위들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렇게 권리는 정치의 영역이 된다. 그렇기에, 권리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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