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정치경제학적 독해 ①공간문제의 실천적 의미와 인식

우리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끔 운명지워져 있다.

그러나 삶의 존재조건에 관한 진지한 물음에서 비론된 철학의 전통이나 그 이후에 등장한 사회과학이론에서도 시간만이 강조되고 공간에 대한 강조는 매우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변증법도 시간과 관련돼서 사용되었고, 발전이나 진보의 개념도 선형적 시간틀 속에서 사고되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수많은 사회현상 혹은 사회과정들은 사실 구체적인 공간을 차지한 채로 전개되고 있기에 공간이 배제된 사회이론은 구체성을 담보하는데 결격사유가 있다.

70년대까지 (물론 아직까지도) 학문적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른바 기술적(descriptive)·실증적 공간연구 방법론에서는 공간을 텅빈 곳, 무엇인가 채워져야하는 고정된 실체, 물리적이고 기하학적인 실체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공간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다.

푸코에 따르면 공간은 사회관계(권력, 계급 등)를 담아내고 있으며 또 사회관계에 의해 재생산된다.

따라서 공간은 사회관계화의 긴밀한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나 푸코에게서 공간은 아직까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인식론적 공간의 의미가 강하고 모호하기 짝이 없다.

공간의 관념을 자연과 실천, 즉 사회생활에 대한 이론으로 전환시키는 문제를 놓고 본격적으로 씨름한 사람은 앙리 르페브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해낸 것은 공간생산, 즉 사회적 공간이었다.

사회적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이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사회적 관계로 사회공간을 생각하면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수많은 사회공간이 생겨나고 우리는 하나의 사회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사회공간을 대면하게 된다.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은 공간적 존재를 가질 때에만 사회적 존재로서 그 구체적 실체를 가진다.

이제 사회공간 자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을 체현하게 되고, 공간이 내포하는 모순들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수준으로 이송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공간의 역사는 자본축적의 역사에 상응하게 되고 공간의 생산은 자본주의에 필연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 르페브르르의 공간생산론이다.

자본축적논리가 공간에 관철된다고 주장하게 되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서로 다른 공간들의 존재양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안게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등장한 것이 80년대 이래로 계속되어온 비판적인 진영에서의 공간연구 흐름들이다.

이중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직면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혹은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흐름이 있다.

이것은 거대서사와 동일성, 본질등의 용어를 폐기하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을 수용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던 공간은 감각적인 도시 공간을 형성할 수 있도록 상징을 제시할 수 있는 형태, 거대공간 단위의 생산보다는 작은 공간 단위의 생산, 문화에 기원을 두는 토착적 양식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빠른 속도와 공간 생산을 설명하기보다는 현상적인 모습과 분위기를 자세히 묘사하는데 머물고 있으며 담론으로서의 공간, 텍스트로서의 공간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급작스럽게 쏟아져나오고 있는 이른바 도시경관분석, 공간문화담론 등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간생산의 빠른 흐름을 묘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공간생산의 원인과 공간생산을 둘러싸고 있는 갈등이 설명되거나 지양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공간생산이론들은 자본주의 공간의 속성을 차이의 근거로 이해하고 있다.

즉 타자의 소리에 본래성을 인정함으로써 모더니즘에 급진적 반기를 들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이 공간에서 유래한 차이를 절대적 타자성, 연관성의 부재로 특징지울 경우, 타자들의 소통불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어버림으로써 급진적 역량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의 무시간성은 시간의 무공간성이 구체성을 결여한 것만큼 총체성 혹은 연관성을 상실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 법칙의 관철이라는 공간 추상적 논리와 다양한 공간적 속성들의 재생산관계라는 구체적 현실은 우리에게 공간연구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것인지를 암시한다.

즉 공간의 무시간성과 시간의 무공간성을 극복하고 공간과 시간의 상호교섭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차이의 절대성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공간의 생산에서 추상과 구체의 문제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지역적으로 불균등하게 그러나 가치의 법칙을 관철시키면서 발전해왔다.

사회분석에서 공간을 도입할 때 공간의 무시간성도 아니고 시간의 무시간성도 아닌 시공간의 동시적 생산이라는 관점에 선다면 공간은 차이와 진보의 문제가 뒤엉켜 있는 곳이 된다.

다시 말해 공간정치의 가능성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공간연구에 도입되고 있는 현란한 사회문화이론들은 공간정치의 결과들이 도출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기보다 그 결과- 막대한 스펙터클의 형성 혹은 쇠퇴-를 주어진 것으로 보고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저항의 실천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공간연구는 시공간 상호교섭이라는 인식론위에 서서 공간을 둘러싼 모순에 초점을 맞출때 비로서 보편성과 구체성을 갖춘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의 로두스섬은 추상적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또 살아갈, 모순 가득한 이 땅위에서 시작된다.

지금 바로 여기서 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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