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게 웃는 이주현씨 제공=홍보실
밝게 웃는 이주현씨 제공=홍보실

이주현(정외∙20)씨가 허리부터 발목까지 벨트로 웨어러블(Wearable)로봇을 고정한 채 마지막 경사로를 내려오고 있다. 양손에는 지팡이를 쥐었다. 오른쪽 지팡이에는 로봇을 조종할 수 있는 버튼이 있다. 지팡이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무릎, 발목과 같은 관절 부분의 모터가 움직인다.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5분51초. 이씨는 20개국 53개 팀이 참여한 ‘사이배슬론(Cybathlon) 2020 국제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2020년 11월, KAIST에서 사이배슬론 대회가 열렸다. 사이배슬론은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들이 최첨단 보조 로봇을 통해 역량을 겨루는 국제대회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19로 인해 나라별로 경기장을 지어 다원 중계했다. 이씨는 착용형 외골격 로봇(EXO∙Exoskeleton robot) 종목에 출전했다. 대회가 끝난 후 여유로운 방학을 보내는 그를 1월21일 화상 회의 줌(Zoom)으로 만났다.

외골격 로봇(EXO) 종목은 하반신 완전 마비 환자가 다리를 감싸는 로봇을 착용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경기다. 임무는 ▲소파에 일어서서 컵쌓기 ▲장애물 지그재그 통과하기 ▲불균일 험지 지나가기 ▲계단 오르내리기 ▲옆 경사로 지나가기 ▲경사로&문 통과하기까지 6개로 구성돼 있다. 이씨가 착용한 로봇은 KAIST 공경철 교수(기계공학과)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나동욱 교수가 공동개발한 워크온슈트4다.

경기에서는 3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씨는 기록을 점차 단축시켜 마지막 도전에서 5분51초를 기록했다. 6분51초를 기록한 4위 미국팀과 1분의 시간차를 두며 동메달을 얻었다. 이씨는 뉴스에 나오는 자신을 보며 동메달 수상을 실감했다. 경기 당일의 기억을 묻자 “처음엔 굉장히 떨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해졌다”고 말했다.

 

사이배슬론으로 다시 한 번 일어서다

이씨는 미국 CIA 요리학교에서 제과 제빵을 배우기 위해 고등학교 1학년부터 유학을 준비했다. 치열한 준비 끝에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합격장을 얻었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같은 해 교통사고로 척수 손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충격으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긍정적인 성격의 이씨도 자꾸 무기력해졌다.

그러던 중 재활 치료 과정에서 만난 나 교수가 사이배슬론 대회의 참여를 제안했다. 이씨는 이를 다시 일어날 기회로 생각해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어쩌면 인생 위기의 순간에 그는 “그냥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대회 참여 결정 후 한 달 만에 바로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 첫날의 기억을 묻자 그는 “걷는 법을 잊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기술이 발전해 하반신 마비 환자들이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연습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찾았다.

선수 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착용형 로봇이 생각보다 무거워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훈련과 학교 생활을 병행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특유의 긍정적이고 담담한 성격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이씨는 “힘든 순간을 버티고 난 뒤 느낄 보람을 생각하며 이겨내려 했다”고 전했다.

부모님, 친구들에게 힘든 부분을 이야기하며 위로받기도 했다. 그 결과 작년 초, 본교 정치외교학과 합격과 사이배슬론 최종 선수 선발의 영광을 동시에 안았다.

 

이씨의 숨은 조력자, 이화

이씨가 사이배슬론 대회에서 착용한 로봇의 이름은 본교 상징색 ‘이화그린’에서 따온 ‘그린이’다. 로봇 이름을 그린이로 지은 이유를 묻자 그는 “선수로서 이화여대를 대표하기도 하지만 이화여대도 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2020년 1학기 본교에서 들었던 <젠더와역사> 수업은 그가 애교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젠더와역사>는 여성학 강의로, 본교생 사이에서 ‘이화에서 꼭 들어야 할 수업’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씨는 해당 수업을 듣기 전에는 여성학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수업을 들으며 관심이 생겼다”며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일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본교 장애학생지원센터도 이씨에게 큰 도움이 됐다. 센터는 이동이 불편한 그를 위해 학교 내 이동을 도울 학생을 연결했다.

코로나19로 인한 대학 생활의 아쉬움에 대해 묻자 이씨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동기들과 학식을 먹는 등  일상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이 가장 크다고 했다. 운동을 즐긴다는 그는 코로나19 상황이 진정되면 본교 사격 동아리 쏨(SSOM)에 지원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다시 찾은 꿈, 21세기 헬렌 켈러

이씨의 궁극적인 꿈은 장애인과 여성 인권을 위해 힘쓰는 것이다. 장애인 인권에 있어서는 당사자로서 가장 현실적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 여성 인권에 대한 생각은 앞선 <젠더와역사> 수업의 영향이 미쳤다.

꿈과 관련해 롤모델이 있냐는 질문에 이씨는 “조금 클래식할 수도 있지만 ‘헬렌 켈러’”라고 말했다. 비장애인에게도 힘든 일을 두 가지 장애를 가지고 해낸 헬렌 켈러가 대단하게 느껴져서다. 그는 “헬렌 켈러 혼자만의 힘으로 그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며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작년부터는 국제 기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외교부 서포터즈도 준비하고 있다. 국제기구나 외교부 서포터즈로 활동하며 전 세계의 뉴스를 접하는 게 최종 목표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씨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향한 응원의 말도 잊지 않았다.

“저도 처음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혼자서 밥 먹기 같은 아주 사소한 일부터 차근차근 시작했어요. 힘들어도 용기를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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