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나를 찾다, 영화가 전하는 변화의 시간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나를 찾다, 영화가 전하는 변화의 시간
  • 김해인 기자
  • 승인 20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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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변화가 낯설고도 익숙한 지금,이 폭풍우가 지나가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이런 변화의 시간이 오늘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혼잡한 시대 속에서 방황하고 고민했다. 격동의 시기 안에서도 일상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모두 나름의 길을 찾아 한 발자국씩 나아간다. 예민하게, 때로는 평온하게. 각자의 속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흔들리는 세상 속 멈추지 않는 날개짓에 대해,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9)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일어날 리 없다고 믿었던 이 사건은 그 당시 한국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거다.

그 해, 벌새의 주인공 김은희(박지후 분)는 중학교 2학년이다. 1남2녀의 셋째 딸로 태어난 그는 학원에 다니고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친구와 노래방에 간다. 평범하디 평범한 소녀, 너무 흔해서 특별한 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 소녀에게서 관객은 ‘세계’를 그리고 ‘나’를 발견하게 된다.

벌새는 1초에 90번 날개짓을 한다. 하지만 겉으로 봤을 때는 알 수가 없다. 그냥 날고 있는 벌새일 뿐이다. 우리가 남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인생을 살기 바쁜 우리는 서로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시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보편의 사건을 겪게 된다. 그 기억을 통해 나의 감정을 떠올리듯, 문득 떠오른 감정은 보편의 기억을 다시 금 불러온다. 보편과 특수라는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 우린 나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김보라 감독은 비디오머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보편의 감정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안의 것을 깊게 들여다보면 결국 다른 사람을 알게 되죠.”

감독은 쉬지 않는 노력으로 날고있는 벌새를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은 순간들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런 대수롭지 않은 순간들이 인간을 살아가게 함을 발견한다.

학원 선생님이 건넨 차 한 잔, 싸웠던 친구가 건네는 사과의 말, 나를 좋아하는 후배, 얼른 나으라고 말해주는 병원 아주머니의 한 마디, 엄마가 밥 위에 얹어주는 반찬 한 점. 모두 은희에게 위로가 되는 것들이다.

은희는 가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쉽게 사랑받지 못한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외로움은 은희를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상처를 받듯 생각지 못한 순간에 위로를 받는다. 은희는 다니던 한문학원에서 새로운 선생님 김영지(김새벽 분)를 만난다. 처음 만난 날, 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뭘 좋아하냐고 묻는다.

영지선생님(왼쪽)과 은희가 우롱차를 마고 있다.출처=네이버영화
영지선생님(왼쪽)과 은희가 우롱차를 마고 있다.
출처=네이버영화

“전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해요” (은희)

“저도 만화 좋아해요” (영지 선생님)

단 한 마디, 저 한마디가 은희를 일으켜 세운다. 뭘 좋아하는지 물어봐 주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해주는 것. 별 것 아닌 것들이 사람에게 위로를 준다.

결국 1994년 성수대교는 무너진다. 하지만 은희는 성수대교가 무너져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쉴 새 없이 찾아오는 보편의 경험들, 그 무게를 견디게 해주는 것은 결국 ‘한 마디’다. 내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움직여보는 손가락 한 마디.

변하는 역사 속에서 우리는 울고, 웃고, 느끼고, 견딘다.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 길을 잃은 이들에게 영지 선생님의 편지를 건넨다.

출처=네이버영화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아서,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1993)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은 연극과 같고, 연극은 인생과 같다.(人生如戱, 戱如人生)”

청데이(장국영 분)의 삶은 중국의 고전극인 ‘경극’ 그 자체다. 데이에게 경극은 삶의 이유이자 자기 자신이고 ‘일분 일초도 떨어질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그는 같은 경극학교 출신 단샬루(장풍의 분)와 함께 휘몰아치는 중국 역사 속 예술인의 삶을 이어나간다.

데이는 어릴 때 베이징 경극학교에 버려진다. 노래부터 대사, 정교한 무용, 무술까지. 경극의 훈련 과정은 아주 고되고 가혹했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탈출한 데이는 우연히 경극 ‘패왕별희’를 보게 되고, 웅장하고 화려한 공연에 마음을 뺏긴 채 학교로 돌아온다.

데이와 샬루는 크면서 패왕별희의 주연을 맡게 된다. 초나라 패왕 항우와 애첩 우희의 이별을 담은 이 경극에서 샬루는 패왕을, 데이는 우희를 맡게 된다. ‘죽은 항우와 우희가 환생한 것 같은’ 연기를 펼치며 이들은 당대 최고의 경극배우가 된다. 다만 데이는 무대가 아닌 일상에서도 그들의 ‘패왕별희’가 이어지길 바랐다.

패왕별희의 주연을 맡은 살루와 데이
출처=네이버영화

"사부님이 그러셨잖아. 죽을 때까지 함께 하라고. 샬루, 너 죽을 때까지 우리 함께하면 안될까?” (데이)

“우린 반평생이나 함께 했는걸” (샬루)

“안돼! 한평생이어야 해! 일분, 일초가 모자라도 한평생이 아니야!” (데이)

예술은 일분 일초의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예술, 영혼, 자유. 아름다운 것들은 너무나도 쉽게 부서진다. 잡고 있지 않으면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리기에 단 한순간도 손을 놓을 수 없다. ‘극에 빠져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데이의 집착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는 어디인가’, ‘둘은 분리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영화는 개인과 사회의 공통된 변곡점과 꺾이지 않는 지조를 보여준다. 연극의 막이 올랐다가 내리듯, 중일전쟁, 일본 패망, 공산당 집권, 문화대혁명이 연이어 터지고, 어제의 권력자는 오늘의 반역자가 된다. 모든 것이 변하는 상황에서도 데이는 자신의 길을 간다. 일본군 앞에서도, 국민당 앞에서도, 공산당 앞에서도 경극을 한다. 반동세력으로 찍혀 재판에 서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신념은 변치 않는다. 반면 샬루는 휘몰아치는 이념들 속에서 자신을 잃고 소중한 이들과의 관계를 자신의 손으로 부수게 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서로를 챙기던 데이와 샬루의 관계는 거대한 역사 앞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데이의 노력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된 것. 그의 강한 의지마저 사회적 변동 앞에서는 무력해 진다. 구세대의 것을 모두 태워버리는 화염 속에서, 데이는 혼란스러운 세상과 무너진 경극, 조각난 관계에 분노한다.

출처=네이버영화

“재앙이 하늘 위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해? 아니야! 절대 아니야! 불행은 스스로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거야” (데이)

무력한 개인이지만 재앙을 만드는 것 역시 한 걸음이다. 데이는 이를 알고 있었다. 일상이 모여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다시 개인에게 침투해 온다는 것을.

잔혹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인생은 불탔지만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은 계속 남아 빛난다. 격동의 시기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몽상가처럼 보이던 데이의 신념은 지금껏 남아 있지만, 시대를 휩쓸었던 이념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연극보다 더 연극 같 은 삶을 산 청데이, 그가 경극을 향해 보였던 강렬한 눈빛은 ‘흐르는 역사 속에서 무엇을 쫓을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춤 · 노래 · 사랑을 꿈꾼다는 것, 스탠리 도넌(Stanley Donen), 진 켈리 (Gene Kelly) 감독의 ‘사랑은 비를 타고’ (1952)

우산을 쓴 한 남자가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행복하게 미소 짓는다. 비 내리는 거리를 걸어가며 콧노래를 부르던 그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본 후 쓰고 있던 우산을 접어버린다. 그는 내리는 비마저 달콤하게 느껴진다는 표정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명장면, 돈이 비를 맞으며 노래하고 있다.
출처=네이버 영화

“난 빗속에서 노래하네, 빗속에서 그저 노래하네.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난 또 다시 행복하네(I’m singin' in the rain, just singin' in the rain, What a glorious feel and I’m happy again)”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의 한 장면 이다. 뮤지컬 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오마주 되는 명장면이다. ‘가슴 속에 태양이 있으니 이 비와 먹구름이 무슨 의미냐’며 사랑을 노래하는 이 남자는 주인공 돈 락우드(진 켈리 분, Gene Kelly)다.

돈은 유명한 영화배우로, 스턴트맨을 하다 우연히 무성영화에 출연하게 돼 스타가 된다. 그는 같은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 리나 라몬트(진 헤이근 분, Jean Hagen)와 할리우드에서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팬들을 피해 도망가던 돈은 우연히 연극배우 지망생 캐시 셸던(데비 레이놀즈 분, Debbie Reynolds)을 만나게 되고, 둘은 티격태격 싸우다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다. 1927년, 첫 유성영화 ‘재즈싱어’가 개봉한다. 이로 인해 음악과 자막만으로 진행되던 무성 영화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한 순간에 위기를 맞는다.

유성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영화사 대표는 간판 배우인 돈과 리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유성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리나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카랑카랑하고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리나(왼쪽)의 뒤에서 대신 노래를 부르는 캐시.출처=네이버영화
리나(왼쪽)의 뒤에서 대신 노래를 부르는 캐시.
출처=네이버영화

“캐시의 목소리를 쓰는거야! 리나는 그냥 입만 움직이고 캐시의 목소리가 그녀 대신 노래랑 대사를 하는 거지” (코즈모)

돈의 친구 코즈모(도널드 오코너 분, Donald O'Connor)의 아이디어로 영화사는 리나에게 캐시의 목소리를 입히게 된다. 하지만 이후 캐시는 영화에서 지워질 위기에 처한다. 이는 변화의 시대에 언제나 일어나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변화가 오면 도태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시대의 인물은 부적절한 방식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려 한다. 영화는 이런 할리우드의 위선을 풍자한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1920년대 할리우드의 변화와 해프닝을 유쾌하게 담는다. 하지만 영화의 진가는 쉴 새 없이 펼쳐지는 배우들의 춤과 노래에서 나온다. 세트장을 활보하는 배우들의 에너지는 보는 사람의 몸도 근질거리게 만든다. ‘싱잉 인더 레인(Singin' in the rain)’ 장면을 사람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춤과 노래, 사랑이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예술과 사랑은 편집과 위선 사이에서도 진실함과 순수함을 드러낸다.

변화하는 시대엔 언제나 본질을 묻는 질문이 나온다. 변화를 따라갈 것인가 말 것인가, 전통을 지킬 것인가 혁신에 도전할 것인가. 이는 어느 시대에나 우리를 찾아오는 단골 질문이다. 그러나 사운드 도입으로 인한 혼란의 시기를 노래로 채워진 유성영화가 그려냈듯, 미래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변화는 찾아오고, 미래는 알 수 없다. 아이러니한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가능성을 열심히 예측해보는 것뿐이다. ‘춤’, ‘노래’, ‘사랑’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