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사 100주년, 여성은 어떻게 그려져왔는가
한국 영화사 100주년, 여성은 어떻게 그려져왔는가
  • 박채원 기자, 배세정 기자
  • 승인 201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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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0월27일 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상영된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1919)에서 국제적 성과를 얻은 ‘기생충’(2019)까지. 지난 100년의 시간 동안 수 많은 한국 영화는 여성을 어떻게 다뤄왔을까. 

과거 한국 영화 속 여성은 기득권인 남성의 시선에서 타자화됐다. 순결하거나 타락하거나, 단 두 개의 선택지만 고를 수 있었던 것은 비단 영화 속 여성은 아니었다. <벌새>, <메기> 등의 여성 독립 영화가 주목받기 시작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이 주체가 되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절실히 필요하다. 

본지는 한국 영화사 속 여성이 어떻게 다뤄지고 왜곡돼 왔는지 살펴보고, 이를 벗어나고자한 영화를 소개한다.

 

△ 모성은 존재하는가

여성에게 모성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며, 모성이 없는 여성은 손가락질 받는다. 이러한 모성 이데올로기는 영화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성 이데올로기 영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영화는 ‘미몽’(1936)이다. 신격화된 모성을 벗어나는 인물의 비극을 다룸으로써 모성 이데올로기를 견고히 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한 가정의 엄마이지만 허영이 심하고 가정에 신경 쓰지 않는다. 겉모습은 조선 여성처럼 보이지만 비싼 옷을 고르고, 다른 남자와 정을 나누는 등 관습적 여성을 벗어나는 모습을 모인다. 살림살이를 책임지라는 남편의 말에 “그럼, 살림살이 잘하는 사람하고 사시구려!”라고 대꾸하기도 한다.

신여성을 보여줌으로써 시대 흐름이 바뀜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애순이 자살함으로써 신여성은 비극을 말한다. ‘<미몽>, 신여성 비판을 위한 기획’(이효인, 2011)에서는 애순의 비극적 결말을 보여주면서 예비 신여성들을 가부장제의 틀 속에 가둬 젠더 이익을 보호하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이후 한국 영화에서 ‘오로라 공주’(2005), ‘세븐 데이즈’(2007) 등 자식을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가 등장한다. ‘오로라 공주’의 순정(엄정화)은 딸의 복수를 위해 연쇄살인범이 되며, ‘세븐 데이즈’의 지연(김윤진)은 납치당한 딸을 되찾기 위해 공권력이 아닌 자신이 직접 나서 고군분투한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는 모성애의 극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엄마(김혜자)는 아들 도준(원빈)이 살인 혐의를 벗기기 위해 괴물이 된다. 영화 속 엄마는 이름도 없다. 도준의 엄마일 뿐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지능이 낮은 아들 도준을 과잉보호하는 엄마의 모습이 표현된다. 심지어 도준이 엄마의 가슴을 만지며 잠드는 장면은 엄마가 아들의 성적 욕구까지 해결해주는 모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미쓰백’(2018)<br>​​​​​​​출처=네이버영화<br>
‘미쓰백’(2018)
출처=네이버영화

하지만 모성은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여성은 모성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으며 있다고 해도 그 모습은 다양하다. 영화 ‘미쓰백’(2018)은 자식을 위해 헌신을 다하는 모성 신화를 벗어난다. 아동학대를 당하던 지은(김시아)과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상아(한지민)는 엄마와 딸이 아니라 진정한 연대를 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둘은 포장마차에서 이름을 교환함으로써 수평적 관계를 맺어간다.

 

“질척거리지 말고 그냥 먹고 가. (침묵) 미쓰백. 그렇게 부르라고.” (상아)

“저는 김지은. 9살.” (지은)

 

상아는 지은을 지키며 무조건적 희생을 보이는 인물이 아니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서로 치유해준다. 아동폭력에서 도망쳐 나온 지은을 데리고 나온 상아는 지은을 씻기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는다. 지은은 선뜻 다가가기 두려워하지만, 상아가 자신의 등에 남은 상처를 보여준다. “봐. 너나 나나”라고 말하는 상아. 지은은 상아에게 가까이 다가와 상처를 만저 준다.

“나는 무식해서 너한테 가르쳐줄 것도 없고, 뭐 가진 것도 없어서 줄 것도 없어. 대신 니 옆에 있을게. 지켜줄게.”(상아)

“나도 지켜줄게요.”(지은)

 

△성을 파는 여성을 보는 시선

한국 영화 역사 100년 사이엔 성매매를 다루는 영화도 다수 등장했다. 보통은 성매매를 구매하는 사람보다는 성매매를 판매하는 여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적 구분은 한국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매매하는 여성은 ‘창녀’로 구분되며 그들은 영화 속에서 주체가 아닌 남성의 시각으로 보여지는 타자로 등장한다.

‘한국영화의 여성재현’(정사강, 김훈순, 2010)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 ‘노는계집 창’(1997), ‘너는 내 운명’(2005)을 분석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주인공 영자는 가정부로 일하며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만 성매매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후 새로운 남성을 만나 가정을 꾸린다. ‘노는계집 창’ 주인공 영은(신은경)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술집에 찾아갔다가 집창촌에 팔려가 성매매를 한다. 술집을 차리는 등 자립을 시도하지만 결국 생계를 위해 예전의 집창촌으로 되돌아간다. ‘너는 내 운명’에서 성매매를 업으로 삼던 은하(전도연)는 석중(황정민)의 구애로 그와 결혼하지만 헤어진다. 은하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줄 모른 채 다시 성매매에 뛰어들어 수감된다. 석중은 은하를 기다리고, 결국 둘은 재회한다.

논문에서는 이 영화의 성매매 여성이 공통적으로 가부장제에서 배제돼 성매매를 시작하며, 이후 성매매 여성을 구원하는 사람은 남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너는 내 운명’에서 은하는 다방에서 일할 때와 성매매할 때의 모습이 상반되게 묘사됨으로써 여성의 이분법적 이미지를 고착화한다고 말한다. 성애적 장면에서 카메라는 남성의 시점이다. 여성의 얼굴이나 육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반면 남성의 얼굴은 등장시키지 않는다.

 

 ‘죽여주는 여자’(2016)<br>​​​​​​​출처=네이버영화<br>
 ‘죽여주는 여자’(2016)
출처=네이버영화

배우 윤여정 주연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는 이러한 양상과 다르게 성매매를 다룬다. 주인공 소영(윤여정)은 일명 ‘박카스 할머니’다. 노인들을 상대로 성을 판매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죽여주는 여자’는 소영이 노인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한다’는 의미와 노인의 부탁으로 진짜 그들을 ‘죽여준다’는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

영화에서 소영은 가부장제에 속하지도, 가부장제에서 배제되지도 않는다. 그저 소영은 소영 개인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을 팔지만 여느 노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성애적 장면에서도 남성 시점에서 소영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영화 초반 소영이 성병을 치료하기 위해 들른 병원에서 자신의 아이를 낳은 필리핀 여자를 버린 의사 캐릭터를 통해 성관계에 있어 남성의 책임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서영은 한때 자신의 성을 팔았던 노인에게 부탁을 받는다. 삶의 의지를 잃었으니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이다. 서영은 돈을 받고 노인을 죽여준다. 경찰에게 붙잡힌 서영은 이런 말을 한다.

“혹시 봄 돼서 감방 가면 안 될까요?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 도망 안 갈게요. 차라리 잘됐지 뭐. 어차피 양로원 갈 형편도 안 되고. 거기 가면 세끼 밥은 먹여주는 거잖아요. 요즘은 반찬이 뭐가 나오나… 올겨울은 안 추웠으면 좋겠다.”

또한 아래 대사는 영화가 성매매하는 여성을 보는 관점이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다.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 지워지지 않기 위해, 여성 퀴어

‘여성 퀴어’는 ‘남성 퀴어’에 비해 그 존재가 지워져 왔다. 간혹 나타났다고 해도 여성 퀴어는 남성을 증오하는 것에서 시작된 감정, 뒤틀린 욕망, 정신질환, 가부장제에 대한 반항 등으로 묘사돼 왔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 속 부수적인 요소 혹은 요깃거리로 등장했으며 그조차도 이성애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이처럼 고여 있던 연못에 새로운 돌을 던진 것이 ‘도희야’(2014)와 ‘아가씨’(2016)다. '아가씨' 역시 남성의 폭력과 억압을 배경에 둔다. 하지만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배경의 히데코와 숙희의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와 인과관계를 가지지는 않는다.

‘도희야’에서 사회는 영남과 도희 의 연대에 해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영화는 둘이 함께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며 기존 한국 영화사의 여성 퀴어 서사를 박차고 나간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캐롤’(2015)을 필두로 외국 여성 퀴어는 하나둘 영화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와 달리 한국 영화사에서는 여전히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한국 여성 퀴어 영화가 이토록 반가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마더 인 로(Mother in Law)’(2019)
제공=(주)인디스토리 ‘

신승은 감독의 ‘마더 인 로(Mother in Law)’(2019)는 그 반가움의 대상이었다. 서울국제프라이드에서 한국 단편 경쟁 작품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도 했다. 영화는 딸의 연인과 엄마의 예기치 못한 만남을 조명하며 관객을 긴장감 속에 놓는다.

영화 속에서 실질적으로 이 둘을 잇는 존재인 현서는 영화가 끝나기 4분전까지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작은 자취방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오직 그의 연인 민진(손수현)과 엄마 형숙(안민영)이다.

“어머니 김치가요, 진짜 너무 맛있어요.”, “제가요, 맛있는 거 먹는 거를 좋아하고...”라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어떻게든 말을 붙이는 민진이다. 하지만 현서가 친구와 함께 살고 있던 것을 몰랐던 형숙은 민진에게 데면데면하다.

 

 

“장모는 영어로 뭐라고 그래?”(형숙)

“장모는 영어로 마더 인 로예요.”(민진)

“그러면은 시어머니는?”(형숙)

“시어머니도 똑같아요. 마더 인 로.”(민진)

 

우연치 않게 발견한 민진의 성적표는 형숙과 민진이 한걸음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형숙은 영문과인 민진에게 간단한 영어 회화를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고 작은 자취방은 따뜻하다 못해 몽글거린다. 장모가 영어로 무엇이냐는 형숙의 물음에 민진은 ‘마더 인 로’라고 답한다. 이성애적 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한국의 가족 호칭인 ‘시어머니, 장모’가 ‘마더 인 로’로 치환되며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형숙에게 ‘오드리’라고 영어 이름을 지어주며 한결 더 부드러워진 표정과 대화로 현서를 기다리던 민진과 형숙. 이제 겨우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화면을 채우고 있던 온화함은 술에 취해 들어온 현서의 돌발 행동으로 순식간에 굳는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눈시울이 붉어진 민진도 현서와 민진의 관계를 알게 된 형숙도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다. 민진은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숙인 채 형숙을 배웅한다. 그런 민진을 가만히 쳐다보는 형숙. 고개 숙인 민진에게 형숙은 ‘마더 인 로’가 영어와 한글로 적힌 종이를 건네 달라고 한다. 민진이 그의 영어 이름인 샐리와 형숙의 영어 이름 오드리를 함께 적어둔 종이다.

예상치 못한 연인의 부모와의 만남,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은 보는 이마저 당혹감에 머리를 하얗게 만든다. 작은 공간은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번갈아 가며 채운다. 현관문 앞에서 발길을 돌린 형숙은, 샐리와 오드리가 적힌 종이를 건네던 민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먼 위안’(2018)
제공=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두 노년 여성의 모습을 그린 오시진 감독의 ‘먼 위안’(2018)은 또 다른 여운을 남긴다. 혼자 생활하던 금자(이재순)는 헛헛함을 채우고자 친구 여정(김혜경)과 함께 지낸다. 하루를 따로, 또 같이 보내는 금자와 여정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금자는 매일 밤 관절염에 끙끙거리며 잠을 못 이루는 여정을 보며 관절에 좋다는 포도를 준비하고, 불면증에 좋다는 캐모마일 차를 알아본다. 여정에게 이를 알려주며 항상 그 끝에는 “해숙이가 그랬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어느 날 금자의 딸은 금자에게 “엄마,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해지면 되는 거야”라며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없냐고 묻는다. 금자의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은 어떤 생각을 떠올리는지 짐작하게 한다.

금자의 눈길은 여정의 입 모양, 손짓 하나하나에 머물며 그의 애정과 연대를 보여준다. 겨울임을 보여주는 듯한 옷차림으로 나란히 걸어오는 금자와 여정은 진심어린 대화는 추위를 녹이는 듯하다.

“나는 이제껏 좋아하는 감정이 부끄러운 것인 줄 알았어 그런데 이제 좀 솔직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이 든다? 남한테는 안 그래도 나 자신한테는 솔직해야 안 되겠나 싶어”(금자)

“해숙이가 그러데?”(여정)

“응 해숙이가”(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