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속 한 페이지, 민주화 향한 뜨거운 열기 속으로

사진=이대학보DB

 

1987년 6월10일. 전 국민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독재를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1987년 1월 서울대 박종철 열사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전기 고문과 물고문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고, 같은 해 6월9일 연세대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아 민주화 항쟁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전두환 정권 당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의 중심에 섰던 건 대학생들이었다. 이화의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엔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섰지만, 1987년 6월 항쟁 때는 약 만 명의 일반 학생이 모였다고 한다. 당시 운동장과 대강당 계단을 가득 채울 정도로 모인 이화인들의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목소리를 들어보자.

 

교내 시위 진압을 위해 학교 정문에 전투경찰들이 비치된 광경. 시위하는 학생들은 대형 을 짜고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하고 전투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 최루탄 저지에 밀려났다. 사진은 본교 정문과 이화교에서 대치하는 학생들과 전투경찰.사진=이대학보DB
교내 시위 진압을 위해 학교 정문에 전투경찰들이 비치된 광경. 시위하는 학생들은 대형 을 짜고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하고 전투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 최루탄 저지에 밀려났다. 사진은 본교 정문과 이화교에서 대치하는 학생들과 전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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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1980년대로 거슬러간다. 1983년 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민화합조치를 시행하자, 본교 내에 상주하던 경찰이 철수됐다.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생각한 전 전 대통령의 유화 조치였다. 그렇다고 경찰들이 학내에 들어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배외숙(정외·88년졸)씨는 “이화교에서 돌을 던지면 청자켓 입고 운동화 신은 전투경찰이 뛰어 들어와 우릴 연행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본교 정문의 폭은 넓지 않았고, 밑에 철로가 다 보이는 이화교가 있었다. 경찰과 대치할 때 학생들은 최루탄 연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 난간에 엎드리곤 했다.

 

“한번은 후문에서 전투경찰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전투경찰이 학관까지 들어왔어요. 수업을 하는 데 사과처럼 생긴 최루탄을 복도에 던졌어요. 그땐 집회를 하면 양쪽 모두 아수라장이었죠.”

 

전 전 대통령이 집권하기 시작한 1980년부터 매년 5월만 되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제로 진압한 것에 책임을 묻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 전까진 교내집회가 크지 않았다. ‘운동권’이라고 하는 학생들 150명에서 200명 정도가 이화광장에 모여 시위했다.

 

“이화여대 교정에 많이 모여 봤자 200~300명이었어요. 근데 1987년 5월에 그게 두 배가 되고, 1987년 6월에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피격되고 난 다음 날 거의 만 명이 모였어요. 너무 놀랐죠. 이화광장과 대강당 계단을 다 채웠어요. 그 감동과 가슴 떨림을 잊을 수 없어요. ‘국가의 부조리를 외면한 게 아니라 다 인식하고 있었구나’, ‘우리와 같은 젊은이가 이화에서 같이 숨 쉬고 있었구나’라고 느꼈어요.”

 

본교생 약 1천 명은 운동장에서 열린 광주민주영령 추모식에서 위령제, 광주민주화운동 진 상보고,   마당극 등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광주사태를 추모하고자 검은 리본을 착용하기도 했고 ‘광주학살 책임지라’ ‘일당독재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사진=이대학보DB
본교생 약 1천 명은 운동장에서 열린 광주민주영령 추모식에서 위령제, 광주민주화운동 진 상보고, 마당극 등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광주사태를 추모하고자 검은 리본을 착용하기도 했고 ‘광주학살 책임지라’ ‘일당독재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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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당시 본교 부총학생회장이었던 송현진(사회·88년졸)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6월 항쟁은 그 전과 격이 달랐다”고 말했다. “그전까지는 화염병 던지면서 싸우는 게 시위였어요. 안 그러면 경찰도 우릴 보이는 대로 잡아가고 방패로 머리를 찍어 눌렀거든요.”

 

시험 거부 시위를 진행하면서 이화의 민주화 항쟁은 전교로 확산됐다. 송씨는 “전교생이 시험 거부 시위에 동참해야 위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학생들이 이에 동의해줄지 자신이 없었다”며 “그래도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고 도서관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너무 긴장했어요. 운동권이 아닌 학생들에게 같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자고 얘기한 적은 없었거든요. 떨리는 마음을 안고 먼저 메가폰으로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학생들이 공부하다가 책을 덮고 집중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박수를 치는 거예요. 학생들도 뉴스를 통해 대학가에서 시험 거부나 수업 거부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왜 이제 하느냐, 우리도 하자고 얘기해주더라고요. 수업 거부 시위가 이화 전체 학생들이 참여하는 시위로 변하게 된 거죠.”

 

규모가 커지자 학생회관이나 이화광장에서 모이던 시위가 운동장에서 진행됐다. 매일 운동장에 모이다 보니 학생회의 앰프가 터지기도 했다. 그러자 거기 있던 학생들이 한 푼 두 푼을 모아 고장 난 앰프보다 훨씬 좋은 앰프를 샀다.

 

이화인들은 개강과 더불어 제적 학생들의 복교 대책을 포함한 학원민주화운동을 벌였고, 지도휴학과 강제징집 철폐, 졸업정원제와 상대평가제 폐지, 학내 언론의 활성화 등을 주장 하며 교내외 시위에 적극 동참했다. 사진은 화염병을 던지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사진=이대학보DB
이화인들은 개강과 더불어 제적 학생들의 복교 대책을 포함한 학원민주화운동을 벌였고, 지도휴학과 강제징집 철폐, 졸업정원제와 상대평가제 폐지, 학내 언론의 활성화 등을 주장 하며 교내외 시위에 적극 동참했다. 사진은 화염병을 던지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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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역에서 본교 정문까지의 거리 행진 시위를 하기도 했다. 송씨는 “오전 9시인가 10시에 지하철에서 동시에 내려서 정문까지 걸어가 보자고 결정했지만 사람이 많이 올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며 “근데 정문까지 인도와 차도를 학생들이 다 메꿨다”고 전했다.

 

“그때 학생들에게 경찰이 소위 ‘지랄탄’(다연발 최루탄)을 쐈어요. 학생들이 옆에 있는 시장 골목으로 다 들어갔죠. 학생들이 완전히 흩어졌어요. 길거리엔 구두가 벗겨져 있었어요. 그때는 상가에 구둣가게가 제일 많았는데, 그 상가 주인들이 학생들에게 신발을 공짜로 주고 그랬어요.”

 

당시에는 시위하던 대학생을 시민들이 도와주는 일이 흔했다. 이한열 열사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학교 가는 버스를 탔던 배씨도 도움을 받은 학생 중 하나였다. 당시 성산회관부터 길에 경찰이 다 차 있었고, 배씨는 버스에서 시민들을 향해 “나는 끝까지 이한열 학생을 지킬 거다”라며 “뉴스를 믿지 말고 학생들이 왜 거리로 나오는지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버스 기사 아저씨가 버스를 돌려 학교 교문 앞까지 데려다줬다. “시민들이 나를 둘러싸고 정문 안까지 들어가게 해줬어요. 한 아저씨가 ‘학생, 조심해’라고 하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이화의 민주화 항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힘으로 이뤄냈다. 보통 공학에서 여학생들은 돌을 나르거나 소주병을 나르는 등 역할을 분담했지만, 본교생은 플랜카드를 만들고 소주병을 나르는 것부터 화염병을 던지는 것까지 모두 맡았다. 1980년대 시위에 참여했던 박인경(기독·89년졸)씨는 “운동사에서 여성이 보조적으로 비치는 게 억울하다”며 “이대생 중에 운동하는 학생들은 남자친구나 따라 하는 ‘따라니스트’라는 말도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힘은 부족하지만 도움을 받으려 하진 않았어요. 우리가 직접 돌도 나르고 화염병도 만들었는데 위협이 안 되긴 했죠. 그래서 무기를 더 새롭게 만들기 위해 드럼통을 가마니로 씌우고, 시너를 부어서 불을 붙였어요. 그리고 학관 옆 후문 내리막길에 그걸 굴렸죠. 우린 따라니스트나 보조 역할이 아니었어요.”

 

송씨는 “축제 때 타대 학생들이 술 먹고 와서 시위를 대신해 주겠다고 하기도 했다”며 “인간으로서 주체적으로 운동을 했지만, 운동권 내에서도 만연해있는 문화적 차이를 크게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민주화 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그때의 경험이 현재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송지은(물리·92년졸)씨는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며 “그 경험 덕분에 지금까지 꿋꿋하게,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씨 역시 “그때의 내 가치관이 평생 내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 가치관이 옳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제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냥 무게감이 너무 컸던 거죠. 저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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