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이라고 하면 숭고함, 희생정신, 위대함 등의 단어가 뒤따라 나오게 된다.
하지만 과연 이런 단어들이 모성의 성질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일까? 모성은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나아가, 모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 ‘줄리에타’(2016), ‘블랙 스완’(2010)은 차갑고, 나약하고, 파괴적인 엄마의 모습을 제시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케빈을 낳은 후 침대에 앉아있는 에바. 에바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인 프랭클린은 케빈을 안고 웃고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의 한 장면. 제공=네이버영화
케빈을 낳은 후 침대에 앉아있는 에바. 에바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인 프랭클린은 케빈을 안고 웃고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의 한 장면. 제공=네이버영화

△모성은 정말 본능인가, ‘케빈에 대하여’(2011)

“연인들을 보면 첫눈에 사랑에 빠져서 사랑이 100%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100에 이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저는 그만큼의 사랑을 느끼는 데 걸리는 시간이 굉장히 짧은 사람이에요.” 우정민(언홍영·09년졸)씨는 지난 12월 출산한 내과 의사다. 그는 아기가 태어난 순간 그가 말한 100의 사랑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회는 엄마의 ‘역할’에 대해 압력을 가한다고 생각해요. 자녀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엄마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거든요. ‘내가 일을 하느라 아이를 덜 안아줘서, 덜 놀아줘서 아이가 정서적으로 불안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있죠.”

우씨는 ‘케빈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0’에서 시작하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에바가 토마토 축제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의 몸은 온통 붉은색으로 으깨진 토마토로 덮여있다. 그와 동시에 ‘살인마!’라는 소리가 오버랩되며 토마토들은 갑자기 핏빛처럼 보인다. 잠에서 깬 그의 집과 차가 온통 핏빛 페인트로 범벅돼있다. 길을 지나가는 그에게 어떤 중년 여성은 “지옥에나 떨어져!”라며 얼굴을 갈긴다. 그렇게 맞고 나서도 에바는 괜찮다고 한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주인공 에바는 ‘전설적인 모험가’라고 불릴 정도의 여행 본능을 가진 여성이다. 그는 자유로운 여행가로서 삶을 살다가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해 케빈을 낳는다. 자유로운 삶을 포기했던 것 때문인지, 에바는 케빈을 다소 차가운 태도로 대한다.

출산 직후의 순간, 여느 영화에 나올법한 감격하고 기뻐하는 장면은 없다. 지친 채, 어쩌면 조금은 화난 듯 보이는 에바가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을 뿐이다. 울어대는 신생아 앞에서 에바는 화를 꾹꾹 참으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기 울음소리에 지친 그가 평화를 찾는 곳은 시끄러운 공사판. 에바는 케빈에게 말한다. “엄마는 케빈이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이에 대한 반응으로 케빈도 엄마를 괴롭힌다. 에바가 세계지도를 붙여 꾸민 방을 페인트로 엉망을 만들어놓고, 동생의 반려동물을 엄마만 보라는 듯 주방 개수대에 넣어 죽이기도 한다. 에바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혹은 관심을 갈구하기 위해 케빈은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모성의 부재가 범죄자를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것일까? ‘융의 개성화 이론으로 읽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최영미, 조이운, 2018)라는 논문에서는 이 서사를 에바와 케빈이 사회로부터 주입된 역할, 즉 페르소나에서 벗어나 자기실현을 하고자 하는 과정이라고 분석한다. 에바의 페르소나는 여행가이자 이상적인 엄마, 케빈의 경우는 엄마에게 사랑받는 아들이다.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없니?”

“아니.”

“생기면 좋아할 거야.”

“싫다면 어쩔 건데?”

“익숙해져야지.”

“익숙한 거랑 좋아하는 건 달라. 엄마도 나에게 익숙한 것뿐이잖아.”

 

관람자는 위처럼 말하는 케빈에게 다소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이 말에 ‘그렇지 않아. 엄마는 케빈을 좋아해’라는 반박을 하지 않는 에바를 두고 매정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두 인물의 표현 방식은 비뚤어진 방식이라서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냈다. 하지만 어쩌면 관람자도 ‘엄마’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정해놓고 이에 맞춰 에바를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케빈의 아빠이자 에바의 남편 프랭클린은, 지나치다 싶은 케빈의 행동에도 “착한 애야. 남자애들은 원래 다 그래(He’s a sweet little boy. That’s what boys do.)”라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성이 억압당한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는 ‘원래 엄마는 다 그래’라며 ‘엄마다움’을 당연시해온 것은 아닐까. 개인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모성과 상충할 때, 아이를 환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때 ‘엄마’라는 역할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아이가 여성의 몸을 통해 나옴과 동시에 어머니가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엄마가 되는 것에 관한 두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에바의 자유로움을 상징하던 빨간색은 어쩌면 ‘모성’이라는 사회적 개념이 지금껏 여성에게 내온 상처의 색깔일 수도 있다.

 

니나가 잠들기 전 이불을 덮어주고 니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에리카. 영화 ‘블랙 스완’(2010) 중. 제공=네이버영화
니나가 잠들기 전 이불을 덮어주고 니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에리카. 영화 ‘블랙 스완’(2010) 중. 제공=네이버영화

딸에게 투영된 엄마의 욕망, ‘블랙 스완’(2010)

니나는 뉴욕 발레단의 ‘백조’다. 그는 정교한 테크닉과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백조 역할은 뛰어나게 해내지만, 새로운 작품에서 단장 토마스는 순수한 백조와 어두운 매력의 흑조를 동시에 연기할 수 있는 발레리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블랙 스완은 완벽에 대한 집착을 다룬 영화로도 해석되지만, 이밖에도 중요하게 볼 점은 니나와 그의 엄마 에리카의 관계다. 에리카는 니나의 매니저를 자처하며 딸의 커리어를 위한 삶을 산다. 딸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는 면만 보면 전통적인 모성애의 발현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애착은 니나를 점점 고통으로 몰고 간다. 사실 에리카는 니나를 임신하며 일을 그만두게 된 전직 발레리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이 포기한 꿈을 딸이 이뤄내야 한다는 집착을 하게 된다. 자신의 꿈을 니나에게 대입하고, 니나의 성취, 실패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호되게 다그친다. 폭발적으로 발산해야 하는 흑조 역할을 맡기에 니나는 통제된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연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에리카는 니나가 잘 때 이불을 덮어주고, 옷을 입혀주며, 니나를 ‘sweet girl’이라고 부른다. 만약 니나가 8살이었다면 이 장면은 다정한 모녀의 모습이었을 테지만, 딸이 성인일 때 이런 엄마의 행동은 섬뜩함을 자아낸다. 니나를 정성스럽게 관리하는 만큼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면 에리카는 폭력적으로 변한다. 에리카는 니나가 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문손잡이까지 떼버린다. 이 영화가 스릴러 장르로 분류되는 이유 중에는 에리카의 욕망이 파괴적이고 통제적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논문 ‘<블랙 스완>에 나타난 탈모성권력의 영화적 재현양상 분석’(박종덕, 2017)은 어머니의 욕망으로 인해 지체된 니나의 ‘주체화’ 과정으로 이 영화의 주제를 분석했다. 니나가 에리카의 통제에서 벗어나며 자신의 주체성을 찾는 것이 그가 연기하는 흑조의 탄생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에리카는 강박증 때문에 몸을 긁어대는 니나에게 “역할 때문이야. (역할이) 과분한 거야. 과분할 줄 알았어”라고 말한다. 타인의 성취를 깎아내리는 것은 실례다. 에리카가 이렇게 쉽게 니나에게 백조 여왕이 과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딸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증거다. 에리카의 모성은 이렇게 자신을 자식에 투사하고 동일시하는 것으로 발현된다. 블랙 스완은 어머니와 딸의 관점에서 보면, 딸을 어엿한 한 명의 성인이 아닌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좌절된 꿈을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신체로 인식했기에 탄생한 비극이다.

 

“네가 나랑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

“고맙네요.”

“널 낳은 게 실수가 아니라, 내 커리어를 망친 게 실수라는 말이야.”

“무슨 커리어요?”

“...널 가지려고 포기한 내 커리어.”

 

안티아의 친구 베아트리체가 잡지를 읽고 있다. 안티아의 엄마 줄리에타가  그 옆에 누워있다. 영화 ‘줄리에타’(2016)의 장면 중. 제공=네이버영화
안티아의 친구 베아트리체가 잡지를 읽고 있다. 안티아의 엄마 줄리에타가 그 옆에 누워있다. 영화 ‘줄리에타’(2016)의 장면 중. 제공=네이버영화

△왜 어머니는 항상 강해야 하나, ‘줄리에타’(2016)

고전 문학을 가르치는 강사 줄리에타는 기차에서 만난 남자 소안과의 사이에서 안티아라는 딸을 낳는다. 줄리에타는 주체성이 강한 여성이지만, 소안의 죽음 이후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이로 인해 어린 안티아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던 딸에서 엄마를 돌보는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몇 년 후 안티아는 집을 나가게 되고, 줄리에타가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논문 ‘알모도바르 어머니 영화의 전환점-<줄리에타>’(김은정, 2017)는 안티아가 줄리에타를 떠난 이유에 영화가 일부러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녀의 이별이 소안의 죽음에서 비롯됐음은 짐작할 수 있다. 남편 소안이 죽은 날 아침, 십 년 전 남편의 외도에 관해 말다툼을 벌였기 때문에 줄리에타는 그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여긴다.

이 죄책감으로 인해 줄리에타는 엄마라는 위치에서 정신적으로 붕괴하고 딸의 돌봄을 받게 된다. 아직 10대인 안티아는 마드리드에 집을 구하기 위해 직접 부동산을 찾아다니고 엄마를 씻기며 살뜰히 챙긴다. 줄리에타는 이를 회상하며 말한다. “난 녹초가 됐지만 넌 황소처럼 강했어. 마치 갑자기 커버린 것처럼.”

여기까지 보고 나면 관객은 안티아가 엄마를 떠나 사라진 이유가 어린 나이에 엄마를 돌봐야 했던 부담감, 그리고 이로 인한 소통의 부재임을 추측하게 된다. 안티아는 엄마라는 나약한 인간을 돌봐야 하는 나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감독은 “줄리에타는 내가 만들어낸 인물 중 가장 나약한 어머니”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엄마’라는 캐릭터는 모성으로 인해 강인해진 여성으로, 자식을 위해서라면 희생과 범법조차 서슴지 않는 인물로 그려져 왔다. 이런 모습이 모성의 신격화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라는 사람도 부모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때문에 나약해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줄리에타’는 이를 반박할만한 영화다. 어머니라고 해서 언제나 모성애를 앞세우며 강한 척할 수 없다. 비록 안티아는 이로 인해 상처를 받고 떠났지만 줄리에타의 탓을 할 수 없다. 그도 어머니이기 전에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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