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2일~24일 인문극회 공연 후기 기고

  본교 학생들이 올리는 연극 공연을 처음으로 보았다. 작품은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1879)이다. 주인공 노라는 위독한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돈을 빌려야 했는데 그 당시에는 여성의 명의로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노라는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도용해 돈을 빌렸고 남편을 살릴 수 있었다. 그 후로 성공한 남편은 은행장이 되었고 정리 해고를 시작했다. 그때 해고 통지를 받은 직원이 바로 노라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었고 그는 명의 도용이라는 사기죄를 폭로하겠다고 노라와 남편을 협박했다. 위기로 인해 부부는 서로의 본 모습을 드러냈고, 결국 갈라섰다.

  인문극회의 공연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각색을 통해서 노라가 집을 떠난 이후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게 해준 에필로그였다. 노라는 제과점의 주인이 됐다. 좋아했지만 남편이 먹지 못하게 했던 과자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인형의 집’에 갇혀있는 동안 쓰고 있던 검은 가면도 더 이상 쓰고 있지 않았다. 얼굴의 상처가 드러났지만 표정은 훨씬 밝아 보였다. 상처를 덮어 놓으면 오히려 곪는다. 상처는 드러나야 더 빨리 아무는 법이다. 노라는 곧 상처가 아물고 흉터도 사라진 얼굴로 환하게 웃을 것이다.

  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노라가 남편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집을 떠나는 결말일 것이다. 노라는 평생 아버지의 딸, 남편의 부인,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았을 뿐 한 번도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았다. 그런 노라가 남편과 마주 앉아 자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바깥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 즉 인형의 집을 떠나 바깥으로 향한다. 이 장면은 미학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표현(삶)의 본질이 무대에서 표현(연기)되기 때문이다. 표현이란 생각이나 느낌이 언어나 몸짓으로 바깥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다. 노라의 표현을 노라 역을 맡은 배우가 표현하는 것이다. 표현(드러남)의 사건은 동시에 치료(아묾)의 사건이다. 노라가 평생 동안 받았던 억압의 상처가 드러나고 아물기 시작한다. 노라의 자가 치료 효과는 노라를 연기한 배우와 그 연기에 공감한 많은 관객들에게도 전해진다. 그들도 그동안 입은 수많은 상처의 고통을 잠시 잊는다.

  이런 망각의 순간에 문득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본질을 카타르시스로 정의한 것이 떠올랐다. 카타르시스에 대한 대표적 해석 가운데 하나는 고통스런 감정을 배설하게 하는 치료로 보는 견해다. 아테네에서 매년 거국적 행사로 열렸던 디오니소스 제전에서는 수만 명의 관객들이 훌륭한 비극 공연을 봤다. 해마다 수만 명이 치료를 받은 것이다.

  요즘도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더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위해서, 연기를 하는 사람들과 연기를 보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서 천장에 다양한 종류의 조명이 달려 있고, 객석에 등받이가 있는 극장이 필요할 것 같다. 극장은 거대한 상담치료센터와 다름없다. 아니 극장이 더 좋은 센터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치료받은 관객들이 서로를 또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또다시, 그리고 또다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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