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연소로 이루어진 피와 땀의 결정, 우리 여성 저자를 만나다
자기연소로 이루어진 피와 땀의 결정, 우리 여성 저자를 만나다
  • 배세정 기자
  • 승인 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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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엽에서 최명희까지... 24명의 작가의 책과 자료 한자리에
▲ 30일까지 삼성출판박물관에서 개최되는 ‘여성이 쓰다: 김일엽에서 최명희까지’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세계가 있는 것과 같이 또 저에게도 제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결혼하지 않고도 훌륭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제가 실행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한국 근대 여류소설가 김말봉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찔레꽃」의 일부. 1937년부터 <조선일보>에 129회에 걸쳐 연재된 이 소설은 젊은이들의 자유연애와 자유결혼관, 자본주의적 빈부갈등 등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3월30일까지 삼성출판박물관이 개최하는 전시회 ‘여성이 쓰다: 김일엽에서 최명희까지’는 현대 문학사 및 출판사에서 주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여성 저자 24명의 저서와 관련한 자료를 선보인다. 김일엽 작가가 태어난 해인 1896년부터 최명희 작가가 생을 마감한 1998년까지 ‘우리 여성 저자 100년’을 한 공간에서 살필 수 있다.

  전시공간에는 여성 문인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그중 15권의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박경리 작가의 「토지」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책의 배경인 평사리의 사진 페이지가 펼쳐져 있어 생동감을 더한다. 1973년 삼성출판사에서 처음 나온 제1부 세 권은 다소 해져있어 지나온 세월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사회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인물들과 반 세기에 걸친 장대한 서사는 박경리 작가의 생생한 문체를 만나 한국문학에 큰 획을 그었다. 「토지」는 1969년부터 26년 동안 연재됐으며 200자 분량의 원고지 약 4만 장에 이르는 대하소설이다.


▲ 여성 저자들의 작품이 담긴 「한국여류문학전집」 6권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조금만 자리를 옮기면 최명희 작가의 「혼불」과 김일엽 작가의 「청춘(靑春)을 불사르고」가 보인다. 1988년 9월부터 1995년 10월까지 월간 <신동아>에 연재됐던 최 작가의 대하소설 「혼불」은 일제강점기에 몰락해 가는 한 양반가의 며느리 3대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모임’이 결성되고 전라북도 남원시 노봉 마을에 작가를 기리는 문학마을인 ‘혼불 마을’이 조성될 만큼 그 인기가 대단했다.

 


▲ 다양한 작가들의 사진들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문인이자 승려인 김일엽 작가의 「청춘(靑春)을 불사르고」는 그가 불가에 귀의해 일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후 내놓은 회고록이다. 김 작가는 이화학당에서 신문학을 배우고 도쿄 유학을 다녀온 뒤, 이화학당이 자금을 댄 1920년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성>을 창간했다. 자유연애·자유결혼·자유이혼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실천했고 <동아일보> 문예부 기자로 일하며 선구적 여성 문예인으로 평가받았다.

 


▲ 여성 작가 중 최초로 장편 연재를 한 박화성 작가의 작품들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당시 여류작가들의 작품으로 엮인 「한국여류문학전집」 6권도 만나 볼 수 있다. 이 책은 한국여류문학인회 사업으로 출간됐으며 소설, 시, 수필, 희곡 등이 수록돼있다. 1967년 12월18일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육영수 전(前) 영부인,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총장 등 문화계 인사 약 200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1967년 한국 여류문학인회 첫 출간 때 회장을 맡았던 박화성 작가는 「한국여류문학전집」 서문에 이렇게 말했다.

  “여류문학의 개척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사십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에서 줄기차게 뻗어 내려온 남존여비의 완강한 관습과 지극히 인색한 사회의 모든 여건에도 꺾임이 없이 꾸준히 자기의 문학을 키우고 확대시켜 온 우리 여성 문학인들의 창작 활동은 자기미화의 향기로운 개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연소로 이루어진 피와 땀의 결정인 바로 그것이었다.”

 


▲ 박경리 작가의 토지 15권. 책의 배경인 평사리의 사진이 펼쳐져 있다.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한국여류문학전집」이 있는 곳에서 반대편으로 가면 박화성 작가 작품들의 표지가 전시돼 있다.

  박 작가는 1932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백화(白花)」를 연재했고, 이는 여성 작가 최초의 장편 신문 연재였다. 「백화(白 花)」는 고려 말엽 서경의 명기인 ‘백화’가 시련을 극복하고 기품있는 명기가 되고, 결국에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 장편 역사소설이다. 당시 작품의 방대한 규모 때문에 작가가 여성일 리 없다는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외에 영화로 제작 개봉된 「고개를 넘으면」, 유관순의 일대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장편 소설 「타오르는 별」 등 박 작가의 작품 7편 또한 전시돼 있다.

 

  ‘여류’는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이르는 말이다. 남류는 없지만, 여류는 있다. 문학계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은 ‘여류’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져 왔다. 이에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은 “‘여류 특유의 감수성’과 같은 말들은 여성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역사성이나 사상성, 사회 인식이 부족하다는 뜻도 다소 함축하고 있는 성차별적 단어”라며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 세계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