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루쉰(상하이 루쉰기념관, 2011년 촬영)
▲ 1927년 경성제국대학 재직 당시의 웨이젠공(오른쪽에서 두 번째)

  베이징대학 교수 저우쭤런(周作人)은 1925년 당시 존재가 희미했던 일제치하 ‘조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중국문화 연구에 일본학 못지않게 조선학도 필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우리는 일본학이 우리나라 문화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조선이 기여할 수 있는 것도 일본만 못지않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일본적인 것도 아니요 또 전적으로 중국적인 것도 아니다. 나는 여기서 덧붙여 조선예술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싶다.”(「조선 전설」) 한중 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 광범하게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지난 과거를 돌이키면서 근대 시기 한중(韓中) 교류와 상호인식의 역사적 경험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 역사적 경험의 일단을 루쉰(魯迅)과 그 제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루쉰은 상하이에 거주하면서 1929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하여 20일간 체류하게 되는데, 루쉰의 당시 일기를 보면 그는 베이징대학 교수들을 위시하여 그의 제자들과 자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루쉰이 아끼던 제자인 웨이젠공(魏建功)과 타이징농(臺靜農)도 루쉰을 방문하여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밤늦도록 ‘통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 웨이젠공과 타이징농이 모두 한국과 일정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웨이젠공(1901-1980)은 1927년 4월부터 1928년 8월까지 경성제국대학 중국어 담당 교수로 초빙되어 한국에 체류하게 되는데, 당시 한국에서의 체험과 사색을 담은 에세이 성격의 ‘교한쇄담(僑韓?談)’이라는 글을 연재한 바 있다. 이 글은 루쉰이 관여하고 있던 잡지 『어사(語絲)』에 실렸는데, 한중의 역사적 문화적 관계, 일제치하 한국의 상황, 한국 독립의 필요성 등을 상당히 균형 잡힌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는 「중한 사이의 애증(愛憎)」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목전의 사실(事實)로서 중한 인민이 감정적으로 미워하는 것과 이상(理想)으로서 중한 인민이 정신적으로 우호적인 것은 ‘공영공존’의 ‘동아주의(東亞主義)’의 표면과 이면이다”라고 말했다. 한중 인민들 사이에 미워하는 정서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저변에 흐르는 우호적인 정신적 유대감이 더 본질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 그는 당시 서울을 방문한 베이징대학 교수들과 함께 조선의 무당춤을 보고 이왕직(李王職)의 아악 연주를 들었는데, 「청운동 무당춤(淸雲巫舞)」과 「아악(雅樂)」이라는 글에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한국 무당춤을 세밀한 복식(服飾) 그림을 곁들여 설명하고, 조선의 악기 종류를 분류, 중국과 비교 기술하는 등 한국의 민속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학술적인 가치가 뚜렷한 이 글에서 그는 ‘고려 음악의 특색’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특색은 바로 그들 민족성의 표징이며 대체로 비장하고 침중한 쪽에 속하는 것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더욱이 「두 명의 주자(朱子)」라는 글은 웨이젠공의 ‘조선’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는바, 루쉰과 웨이젠공, 타이징농 사이의 스스럼없는 대화에서 오고갔을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웨이젠공은 이 글에서 ‘조선’의 사상과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朱熹)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이러한 두 가지 중요한 관계 하에 조선사상사에서의 대반동으로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추구하였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필요와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명의 주자(朱子)가 조선에 끼친 영향을 잘 안다면 조선에서 20여 년 전 자주독립한 사실이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자연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조선의 유래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으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근래 듣자하니 중국 화교들을 모욕하는 조선인이 많고, 또한 그들은 중국인을 멸시하는 ‘짱코우(Chiangkou)’라는 일본말로 조롱하고, 심지어는 많은 조선인이 길거리에서 중국인을 만나면 때리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감정에 의거하여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동시에 나는 우리나라 국내에 망명하여 정착한 많은 조선인들이 마찬가지로 중국인, 예컨대 경찰과 같은 무리들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이 글은 주희와 주원장의 조선사상사에 끼친 영향, 조선이 독립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조선의 중국인 화교에 대한 공격과 중국내 경찰의 조선인 억압, 그리고 문맥 속에 드러나는 한중 상호이해의 필요성에 대한 사색 등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웨이젠공의 균형 잡힌 시각과 태도는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루쉰은 1929년 5월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서울로부터 귀국한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웨이젠공과의 ‘통쾌한’ 대화에서 한국의 실상을 좀더 이해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어사』의 ‘교한쇄담’에 표현된 한국에 대한 웨이젠공의 시각과 태도에 공감하는바 컸을 것이다.
웨이젠공과 함께 루쉰을 방문하여 ‘통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타이징농(1903-1990)은 루쉰의 평가처럼 ‘향촌의 삶과 죽음, 흙의 숨결을 묘사한’ 향토소설작가로서 단편소설집 『땅의 아들(地之子)』(1928년)로 잘 알려져 있다. 타이징농의 작품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땅의 아들』에 실린 「나의 이웃」이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작중 화자인 ‘나’의 옆방에 세든 ‘조선인’의 기이한 생활모습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나’는 아침에 배달된 신문에서 일본 관련 기사를 읽다가 조선인이 일본의 황궁을 폭파하려다 경찰에 체포되어 어느 날 처형되었다라는 내용을 보고 작년에 옆방에 살던 한 젊은이를 떠올리며 그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해가 들지 않는 음침한 분위기의 옆방에 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나와의 대화에서 조선인임이 밝혀지고, 그의 기이한 생활은 조선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묘사된다. 성냥불을 켜는 소리만 들린다든지, 방안에서 따박따박 구두소리를 내며 왔다갔다한다든지, 편지를 받으면 몇 분 후 곧장 태워버린다든지 하는 기이한 행동을 보이던 옆방의 조선인은 결국 ‘야수들’(경찰을 암시)에게 체포되어 잡혀간다. 멀리서 들리는 ‘당신네 조선 사람들......’이라는, 나의 이국 이웃을 모욕하는 그 야수들의 목소리에 나는 분노하며 그들에게 증오를 보낸다. 1년이 지난 뒤 우연히 신문에서 본 기사의 주인공이 바로 옆방에 살다가 잡혀간 그 조선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건 그대가 아닌가? 그대의 마음 깊이 쌓인 복수를 위해 이런 위대한 희생을 했던 것이리라. 나의 불행한 친구여!”라는 ‘나’의 독백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인의 조선인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일왕 히로히토(裕仁) 암살을 실행하려다가 체포되어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은 박열(朴烈)사건에서 제재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외롭고 고독한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칩거에 가까운 비밀스러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의 형상을 빌려 한국인들에게 독립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나의 이웃인 ‘조선인’을 핍박한 ‘나쁜 놈의 잔혹한 수단’을 폭로하고 그를 잡아간 ‘야수들’을 저주하면서 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아끼지 않는 데서 잘 드러난다. 타이징농은 작품 속에서 ‘조선인’은 일본 지진(관동지진) 이후 ‘작년’에 중국에 들어온 것이라 하였는데, 관동대지진이 1923년 9월에 일어났으니 이 작품의 주요 시간적 배경은 1924년일 것이고 창작 시점은 박열(朴烈)사건의 사형선고가 내려진 1926년 3월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타이징농과 웨이젠공이 막역한 친구사이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타이징농과 웨이젠공의 개인적 친분관계를 고려할 때 1927년 봄부터 서울에 체류하던 웨이젠공이 베이징에 돌아오면 타이징농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의 대화에서 ‘조선’ 이야기는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의 ‘조선’ 이야기는 타이징농에게 한국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가져와 「나의 이웃」 의 내용에 무의식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역으로 타이징농의 「나의 이웃」에 묘사된 한국인에 대한 연민과 한국 독립에 대한 기대는 웨이젠공에게 문학적 감화를 일으켜 한국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태도를 갖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일제치하 ‘조선’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루쉰은 이들 제자들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현실을 좀더 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쉰은 웨이젠공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의 정황을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며, 한국 독립의 당위성과 한중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는 ‘교한쇄담’을 통해 한국 이해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타이징농의 『땅의 아들』을 높이 평가한 바 있는 루쉰은 그 첫 작품인 「나의 이웃」을 통해 한국 독립의 절박성에도 공감했을 것이다. 물론 루쉰이 제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한국 체험과 한국 인식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지만, 그 제자들이 한국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묘사한 데에는 루쉰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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