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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류수인, '멀리서 돌아온 그대 떠나니, 다시 이별시를 짓다'
2014년 11월 03일 (월) 홍석표 교수(중어중문학과) -
   
 
  ▲ 1970년대 류수인 사진  
 
   
 
  ▲ 홍석표 교수와 류앵 여사(왼쪽)의 인터뷰 장면(2013년 7월 촬영)  
 

  지난해 7월 필자는 기대에 부풀어 중국 쑤저우(蘇州)를 방문한 바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류수인(柳樹人)의 따님 류앵(柳鶯) 여사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정원이 잘 꾸며진 단아한 아파트를 찾아 들어서니 벌써 류앵 여사 내외분이 밖으로 나와 반겨주었다. 류앵 여사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분이었다. 마치 부친 류수인의 풍모를 보는 듯하였다. 대화는 중국어로 진행되었지만 유쾌하고 스스럼없는 대화였다. 그녀는 부친의 조국을 자신의 또 다른 조국으로 여기며 자랑스럽게 부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부친의 자전적 회고록 『삼십년 방랑기』의 친필원고(중국어원본)와 부친 관련 사진 등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모친 잉치루안(應起鸞)이 남편 류수인을 회고한 「옛일을 회상하며―한국 혁명선배 류수인의 중국에서의 항일생활」이라는 글과, 자신이 쓴 「늦게 찾아온 영예―부친 류수인 선생을 추억하며」라는 글을 필자에게 전해주었다.

  주지하듯이 류수인(1905-1980)은 1927년 한국 최초로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의 단편소설 「광인일기」를 국내에 번역 소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명이 류기석(柳基石)이며 류서(柳絮)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일제시기 중국 역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당시 아나키즘문예이론가로서 중국 비평계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05년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서 태어나 8세 때 가족을 따라 중국의 북간도로 이주, 1924년 6월 난징(南京)의 화중공학(華中公學)을 졸업하고 그해 9월 베이징(北京)의 차오양대학(朝陽大學)에 입학하였다. 그 후 그는 한국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아나키즘운동의 이론가요 실천가로 활동하게 되는데,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하였고 중일전쟁 시기에는 한국인으로 구성된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 공로로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류수인은 1925년 중국 상하이에서 5·30사건이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반제(反帝)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베이징 조선유학생회 대표로서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열린 민중대회에 참가한 바 있다. 그해 7월 10일자 『조선일보』에는 「베이징 국민대회에서 대중을 흥분시킨 동포―조양대학에 재학중인 류군 벽두에 등단하여 일장 연설」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보자. “그 중에서 외국 사람으로 제일 먼저 등단한 사람은 류기석이라는 동포였었다. 류군은 현재 조양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이날 제일 먼저 등단하여서 침통한 사기로 장시간의 연설을 시험하였으며 연설이 끝나매 단하에 모여 섰던 십만 군중은 비상히 흥분되어 중화민족 만세와 ‘○○○○타도 ○○제국주의’를 높이 불러 많은 중국인에게 흥분을 주었고, 그 다음으로는 독일인, 일본인, 인도인, 대만인, 터키인 등의 대표가 차례로 일장연설을 시험하였더라.” 류수인의 연설 내용은 베이징의 각종 대형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는데, 이 민중대회 연설은 일제(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류수인의 실천가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필자가 전해 받은 류수인 가족들의 회고 또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류수인의 또 다른 일면과 사실을 보여주기에 무척 흥미롭다. 부인 잉치루안은 「옛일을 회상하며」(2006년)라는 글에서 남편 류수인과의 첫 만남, 나라 잃은 이국 청년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부모의 반대와 설득에 성공한 결혼, 남편의 한국독립운동 활동과 그로 인해 아이 넷을 홀로 키우던 어려운 생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짧은 재회의 아쉬움 등을 감동적으로 서술해놓았다. 그녀는 1928년 가을 어느 날 난창(南昌)에서 류수인을 처음 만났고, 그 첫인상을 “그의 눈빛은 번쩍번쩍 빛나고 용맹한 기개가 넘쳤으며, 보자마자 깊은 인상을 남겼다”라고 표현했다. 장시성(江西省) 여자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그때 마침 학생시위를 주도하다 공청단(共靑團)에 참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체포 위협을 받고 난창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후 융슈(永修)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4년간의 연애 끝에 마침내 부친의 승낙을 얻어 류수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류수인은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1932년에는 톈진(天津)의 일본군 병영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하였고 1937년에는 일본의 전면적인 중국 침공이 시작되자 일본의 주중국 대사 다니 마사유키(谷正之)의 암살계획에도 참여하였다. 1938년 이후에는 쑤베이(蘇北) 지역으로 옮겨가 중국 유격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는데, 이 무렵 홀로 아이 넷을 키우던 부인 잉치루안이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보낸 시는 감동적이다. 7언 배율로 씌어진 이 시는 류수인의 필명 류서(柳絮)를 ‘버드나무’(柳)와 ‘솜털’(絮)로 빗대어 표현하는 등 ‘정경교융(情景交融)’의 풍부한 은유로 남편을 그리는 마음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滿懷懮郁訴君知  가슴 가득 우울함 그대에게 알리노니,
鴻雁無書何事羁  큰기러기도 편지 전하지 않고 어인 일로 타향에 오래 머무르시는지.
兩載離情縈夢轂  2년 간 이별에 그리움은 꿈에서 감돌고,
一輪明月系相思  휘영청 밝은 달에게 그리운 마음 전할 뿐.
紅梅吐蕊爭春早  붉은 매화는 꽃술을 틔우며 초봄을 다투고,
綠柳垂絲着絮遲  푸른 버들 실가지 드리운 채 솜털은 천천히 피어나는데,
兒女成行方待哺  아이들은 먹이를 달라고 앙앙 울어대니,
千鈞重任付將誰  이 막중한 책임 누구에게 지우는가?

梅影窺窗春夜寒  매화 그림자 창문에 비추니 봄밤은 더욱 차갑고,
傷心獨自倚欄杆  슬픈 마음에 나 홀로 난간에 기대네.
今宵對月情彌篤  오늘 밤 달을 마주하니 그리움이 깊어져,
此夕思君心更酸  이 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더욱 시리어라.
莫戀江南春色好  강남의 아름다운 경치 탐하지 마시고,
應思塞北昔年歡  북방에서의 즐거운 옛 시절을 그리워하소서.
雲飛千里君忘返  구름 천리 밖 떠나신 그대는 돌아올 것을 잊었는지,
幾點相思淚未乾  그리워하며 흘린 눈물 아직도 마르지 않았네.

  류수인은 이 시를 받고서 전선을 뚫고 “위험을 무릅쓰고 천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지나 부인과 아이들을 만나러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틀 만에 또다시 부인과 아이들을 두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부인 잉치루안은 「멀리서 돌아온 그대 떠나니, 다시 이별시를 짓다」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이별의 아쉬움과 사랑의 다짐을 사무치게 표현하였다.

兩載睽違夢寐思  2년 이별의 그리움은 꿈속에서도 맴돌고,
相逢數日又相離  며칠간 만남에 또다시 이별을 해야 하네.
驪歌再唱心如醉  이별노래 다시 부르니 마음이 취한 듯,
馬齒徒增鬂有絲  어느 듯 나이만 먹어 흰 머리 늘었어라.
万縷相思何處訴  샘솟는 그리운 마음 어디에 호소할까?
幾多別緒暗中悲  얼마나 남몰래 이별을 슬퍼했는가!
陽春似慾留君住  따스한 봄날이 그대를 만류하는 듯하고,
柳影花光樓滴遲  버드나무 그늘 꽃빛 화사한 누각에서 눈물 천천히 흐르네.

感君來去太匆匆  그대는 왔다가 총총히 떠나지만,
脈脈情懷彼此同  서로 사랑하는 마음 그대와 나 한결 같네.
共話淒涼流浪後  함께 했던 이야기는 그대 떠난 후 처량해질 것이고,
空留寂寞夢魂中  꿈속에서도 외로움만 덩그러니 남아 있겠지.
參差綠柳爭春色  들쭉날쭉 푸른 버드나무는 봄 경치를 다투고,
隱約紅桃漾晚風  은은한 붉은 복숭아는 저녁바람에 넘실거리네.
最是無情今夜月  가장 무정한 것은 오늘 밤 저 달이어라,
照人離別倍朦朧  이별할 사람을 비추니 몽롱한 분위기 더욱 짙어지네.

  류수인의 따님 류앵 여사는 「늦게 찾아온 영예」(2010년)라는 글에서 “아버지의 전반(前半) 생애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투성이의 싸움 속에서 보냈다”라고 하며 어린 시절 온화하고 다정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평시에 집에서는 말이 많지 않으셨지만, 내가 아버지더러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면 아버지는 언제나 내 요구를 다 들어주셨다. 끝없이 이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가장 많이 해주신 이야기는 항일투쟁 이야기였다. 이들은 정말이지 감격적인 이야기였다. 회고해보면, 아버지께서는 모두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려주셨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당신이 직접 겪으신 것이었다. 그러니 그토록 생동적이고 그토록 황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심금을 울리던 이야기가 지금도 나의 기억에 남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류앵 여사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1932년 12월 부친 류수인이 주도하여 톈진(天津)의 일본 영사관 폭파사건을 일으켰을 때 베이징에 있던 폭탄을 톈진으로 옮기는 임무를 모친 잉치루안이 맡았다는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겨우 스물다섯의 나이였다. 유행복 차림에 가죽외투를 입은 모던여성으로 분장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신식 가죽상자(안에 두 개의 폭탄이 담겨 있었음)를 손에 들고 이등칸에서 내려 태연자약하게 플랫폼을 빠져나오는데,……아버지와 어머니가 연합하여 ‘연출’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우리 자녀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이처럼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충만한 부인과 아버지에 대한 긍지로 가득한 딸이 있었기에 류수인은 고난에 찬 항일독립운동에 흔들림 없이 매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광복 이후 아나키즘사상으로 인해 그는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데, 한국 현대사의 어떤 비극을 보는 듯하다. 류수인은 1949년 5월, 조국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였으나 2개월을 머물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1952년 11월부터 쑤저우대학(蘇州大學) 역사학과 교수로 취임하면서 쑤저우에 정착하였고, 1980년 11월 사망하기까지 대학 교수로서 동남아역사와 한중관계사 연구에 전념했다.

  류수인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과 관련하여 우리가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한중의 진보적인 지식인의 국제적 연대에 관한 것이다. 류수인은 아나키즘문예이론가로 활동하던 1928년 당시 상하이에서 출판사 편집을 담당하고 있던 스유헝(時有恒)과 함께 루쉰을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문예이론과 사상 면에서 루쉰과 공감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문단에서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던 ‘혁명문학논쟁’에서 루쉰과 류수인은 동일하게 문예의 ‘선전 도구화’ 또는 ‘무기의 예술’을 주장하던 ‘혁명문학파’를 비판하면서 문예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류수인이 루쉰을 방문한 것은 단순히 루쉰 작품의 번역이나 중국의 대표적인 문인을 만나려는 열망 때문만이 아니라 문예이론상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류수인에게는 일종의 사상적 연대를 모색하려는 시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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