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연재 프랑스어와 정체성(2)

▲ 미셸 트랑블레의 극작품 의자매의 한 장면, 1960년대 중반 조용한 혁명을 배경으로 몬트리올 서민 동네 여성들의 애환을 그림. 여성 노동자 계층 역의 등장인물들을 내세워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기 까지 오랜 세월 가톨릭 교회와 가부장적 사회제도 하에서 억압 받던 이 지역 여성들이 성적,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 캐나다 연방의 이중언어 사용 지도

 

  16세기 이래 유럽 열강이 신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할 때 프랑스는 현재의 캐나다에 눈독을 들였다. 캐나다란 원주민 말로 마을을 뜻하는 카나타란 말에서 온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질 좋은 수달피를 얻기 위해 추운 캐나다로 이주민을 보냈다. 척박한 신대륙의 환경은 이민자들을 끌어 모으기에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주둔군과 모피 사냥꾼 및 관료 등 남성 위주로 이주민이 구성되다 보니 인구가 늘지 않았다. 이에 루이 14세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처녀들에게 지참금을 주어 식민지 남성들과 결혼하도록 보냈고, 이런 까닭에 이 처녀들을 왕의 딸이라고 부른다. 왕의 딸들은 귀족의 하녀가 되도록 교육을 받았기에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춘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을 기다리는 것은 야생의 삶을 사는 모피 사냥꾼과 험악한 식민지 환경이었으니 캐나다 여인 잔혹사가 그 때 시작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은 서로 자기 출신지의 방언을 썼기에 일부는 다른 이주민들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사는 곳이 세인트로렌스강 주변으로 제한적이었기에 약 40년의 세월이 지나자 새로운 방언이 형성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퀘벡 주에서 사용되는 퀘벡 방언과 노바 스코시아 주와 뉴 브룬스위크 주에서 사용하는 아카디아 방언의 원형이 된다. 이와 같이 캐나다 프랑스어의 표준화는 본토 프랑스 보다 빠른 18세기에 완성되며, 여기에는 왕의 딸들의 역할도 지대하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익힌 본토의 프랑스어를 가르쳐 준 것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1760년 프랑스가 영국과의 식민지 전쟁에서 패하여 캐나다를 영국에게 넘기고 철수하게 되자 본국에 연고가 있는 프랑스인들은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영국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식민지 지배를 위해 왔던 프랑스인이 다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 역사상 드문 현상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소수였던 영국인은 다수의 프랑스계 주민들에게 그들의 언어인 프랑스어와 종교인 가톨릭 그리고 민법을 그대로 허용하였다. 그러나 미국 독립 후 많은 영국인들이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오게 되었고, 이후 계속 되는 영국계 이민들의 유입으로 상황은 역전되었다. 프랑스어는 캐나다 연방에서 소수의 언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자신의 전통적 가치인 프랑스어와 가톨릭 그리고 농촌 생활에 의지하며 집단적 자폐 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유럽과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그나마 자부심을 갖던 자신들의 프랑스어가 프랑스의 프랑스어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캐나다의 프랑스어는 지배층이 쓰던 이른바 왕의 프랑스어를 모델로 발전된 것이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귀족을 몰아낸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자 언어도 그들의 언어가 대세가 되었다. 그래서 모음 중심의 캐나다 프랑스어와 자음 중심의 프랑스어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프랑스말로 말을 뜻하는 ‘슈발’을 캐나다인들은 ‘주알’처럼 들리게 발음한다고 해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쓰는 프랑스어를 주알이라고 폄하해서 부르게도 되었다. 캐나다 연방 수상을 역임한 퀘벡 출신의 피에르 트뤼도 조차도 제대로 된 프랑스어를 구사하자고 역설할 정도로 주알은 자랑스럽지 못한 유산으로 간주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캐나다 현대사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인 ‘조용한 혁명’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퀘벡의 기치 아래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퀘벡의 현대화를 표방하는 움직임을 보인 사건을 지칭한다. 퀘벡 주정부 주도하에 전기사업을 국유화하면서 확보한 경제력을 수단으로 삼아 퀘벡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및 언어의 경쟁력을 기르고 자치력을 확립하자는 이 혁명은 시위나 피가 개입되지 않았기에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른다. 퀘벡인들은 과거지향적인 프랑스계 캐나다를 부정하고 미래지향적인 근대화를 표방하면서 퀘벡이란 상상력의 산물을 만들어 내고 그 곳의 주민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표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주알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다. 1965년 등단한 극작가 미셸 트랑블레 (1942~ ) 는 데뷔작인 『의자매』를 주알로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캐나다에게는 언제나 이웃의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대서양 건너편의 두 문화적 종주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정체성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타자’로 군림해 왔다. 주알에 대한 자부심 표명은 한 편으로는 캐나다 연방 내에서 소수 언어인 프랑스어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한편, 규범으로 군림하려는 프랑스의 프랑스어 대해서도 독자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하겠다.

  캐나다 연방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이지만, 퀘벡주에서는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 있으며, 뉴 브룬스위크와 노바 스코시아주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출산율 저하에 따른 프랑스어권 사용 인구의 감소는 여기서도 고민거리이며, 이를 위해 퀘벡주는 이민자들이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낼 경우 프랑스어 학교에 보내도록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3억 명 이상이 영어를 사용하는 북아메리카에서 800만 인구의 프랑스어권 캐나다는 언어의 섬과 같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프랑스어의 사용은 자존심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프랑스어가 캐나다 연방 내에서 프랑스어 사용 지역 주민들의 정치적, 경제적 자율성을 담보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미국과 가장 닮은 나라인 캐나다가 자기의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도 프랑스어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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