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의 기법과 창의성 계발(5)
초현실주의의 기법과 창의성 계발(5)
  • 조윤경 교수(불어불문학과)
  • 승인 201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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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한 말장난과 창조적인 언어유희, 그 한끝 차이


썰렁한 말장난과 창조적인 언어유희, 그 한끝 차이



  글을 시작하면서 조금 무리수를 둬 보겠다. ‘바다가재가 바다가재’. ‘고로케가 고로케 맛있니?’ 마지막으로 하나 더. ‘실은 정말 사랑했어...... 바늘을.’

  안심하라.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이런 썰렁한 말장난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초현실주의의 언어유희가 보여주는 창조적 프로세스에 관한 것이다. 로베르 데스노스는 시를 통해 언어유희를 적극적으로 실험한 초현실주의 시인이다. 그의 시 「밤바람」을 보자. “바다의 바다 위에서 미친 사람들이 정신을 잃는다/ 사냥꾼들은 사냥하며 죽은 자들은 죽고/ 론도 춤을 둥글게 춘다/ 신적인 신들이여! 인간적인 인간들이여!/ (...) 천상의 하늘/ 지상의 대지/ 그런데 천상의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 같은 생각의 무의미한 반복이라는 이유로 기피하는 동어반복을 이 시에서는 의도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진정으로 불필요한 반복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모든 인간이 항상 인간적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또한 “그런데 천상의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마지막 행의 질문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이를 통해 시인은 자연스럽고 명백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진리나 관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유도하고 있다.

  「밤이던 낮」이라는 시에서 데스노스는 모순된 표현을 만들어내는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 이 시의 일부인 “그는 강바닥으로 날아올랐다/ 흑단 나무로 만들어진 돌 금으로 만들어진 철사 그리고 가지 없는 십자가/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나는 그것을 사랑하기에 증오한다 누구나와 같이”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는 제목에서 시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순으로 일관한다. 그 과정을 따라가며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과연 밤과 낮, 위 아래는 뚜렷이 구분되는가. 낮이면서도 캄캄한 어둠 같은 중심에 서 본 일은 없는가. 정상에 올랐지만 나락에 떨어졌던 경험, 너무도 사랑하기에 증오했던 경험은 없는가. 즉 삶의 질서를 체계적으로 무너뜨리는 시적 연습을 통해 모순되고 복잡다단한 삶 그 자체를 온전히 체험하고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1950년대에 조향이라는 시인이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면서 언어유희를 적극적으로 실험한 바 있다. “이로니는/ 로니고 로/ 니는 니컬이고 니/ 컬은 컬컬하구나. 컬럭컬럭. 지구가 앓고 있다”(「디멘쉬어 프리콕스의 푸르른 算數」, 1982 일부)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입노래의 방식으로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언어유희를 펼친 후에, 마지막 행에서 유음 ‘ㄹ’과 상반되는 격음 ‘ㅋ’을 내세워 “컬럭컬럭 지구가 앓고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끝나는 ‘로’, ‘니’는 다음 행으로 걸쳐가면서 단절과 연속에 의한 독특한 리듬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함축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의미 전달을 위해 시 뿐 아니라 광고 또한 언어유희를 자주 사용한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언급했던 ‘실은 정말 사랑했어...... 바늘을’은 ‘솔직히 말하자면’이라는 의미를 담은 ‘실은’이라는 부사어를 ‘실’이라는 사물로 전환하여 중의적으로 인식한 언어유희다. 사비냑이라는 광고 아티스트는 이와 동일한 원리를 통해 ‘비주얼 스캔들’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창조기법을 만들어 낸다. 이 기법은 서로 동떨어진 두 개의 이미지를 결합함으로써 유발되는 시각적 충격을 대중의 의식 내부에 각인시키는 기법이다. 사비냑은 주로 인간과 사물들을 연결시키는데, 예를 들어 사람들이 텔레비전 화면 앞 안락의자에 “나사로 죄어진 듯 고정되어 있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문자 그대로 시각화하여 오히려 신선함을 유발한다. 그저 실없는 사람들의 농담에 지나지 않았던 말장난이나 책상 다리, 팔걸이 의자라는 상투적인 은유들이 어떻게 충격적이면서 유머러스한 창조적 이미지로 바뀌는지 보라.

  언어유희에 열중하는 작가들은 우리에게 창조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갖고 있었던 의미들을 비워내고 말놀이에 열중하는 아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러분들도 말놀이에 열중하는 아이가 되어 보시기를. 데스노스나 조향과 같은 시, 사비냑과 같은 일러스트레이션을 시도해 봄으로써,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음상을 잘 살려 말장난이 창조로 전환되는 순간의 기쁨을 만끽해보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