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교에서 5분 만에 갈 수 있는 북아현동 고샅길은 활력을 잃고 폐허가 된 채 남아있다. 북아현동 고샅길은 뉴타운 개발구역에 포함된 이후 마을 주민이 이주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현대식 고층 건물은 곧 사라질 고샅길의 모습과 대비된다. 김나영 기자 nayoung1405@ewhain.net
▲ 사람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인 북아현동 주택가 담벼락에는 거주민에게 강제 이주를 요구하는 공고문이 붙어있다. 김나영 기자 nayoung1405@ewhain.net


  서울 시내 옛길이 사라지고 있다. 중국, 일본은 항저우 ‘허팡지에(河坊街)’, 오사카 ‘호젠지요코쵸(法善寺横丁)’ 등의 옛길을 충실히 유지·복원해 역사 도시로서 경쟁력을 높이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옛길을 보호할 수 있는 근거 법령이 명확지 않아 많은 옛길이 사라졌다. 본지는 무분별한 개발 속에서 사라져 가는 서울의 옛길인 교남동 옛길, 북아현동 고샅길, 하왕십리 옛길 등 세 곳을 찾았다. 또한, 옛길이 보호받지 못하는 원인과 옛길을 복원하고자 하는 시민단체와 시자체의 최근 동향을 살펴봤다.  


△ 뉴타운 개발 속 사라져가는 서울의 옛길…북아현동 고샅길, 하왕십리 옛길 등 사실상 폐허 상태

  스테인리스로 된 낡은 지붕 아래 철근이 다 드러난 가옥, 창문이 뻥 뚫린 집 사이로 난 작은 골목. 3월26일, 본교 기숙사 한우리집 앞에 있는 종합사회복지관 뒷문을 따라 북아현동 옛길을 갔다. 폐허가 된 마을의 고샅길(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은 그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10년 전 이 길을 따라 만개했을 철쭉과 진달래나무는 주인 없는 길 위에서 열매도 못 피운 채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10년 전만 해도 이 마을은 집들 사이에 다른 모양으로 난 고샅길을 자랑했다. 평지가 아닌 언덕을 따라 마을이 형성돼 길은 언덕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나 있었다. ‘사다리길’, ‘갈고리길’, ‘나뭇가지길’, ‘고리길’ 등 길 모양을 따라 명칭도 다양하다.

  북아현동 고샅길은 6·25 전쟁, 1960년대 산업화에 밀려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온 사람이 골짜기와 구릉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으며 만들어졌다. 남동쪽 충정로 방향은 1930년대 문화주택(살기 좋게 개량해 꾸민 신식 주택) 단지로 이어지고 서쪽과 남서쪽으로 가면 1930년대 말에 들어선 한옥 마을과 1940년대에 지어진 관사주택지(관청에서 관리에게 빌려 주어 살도록 지은 주택 단지)에 닿는다. 북쪽으로는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판잣집을 철거하고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있다.

  마을 언덕의 정상으로 사다리길을 따라 올라가면 한창 공사 중인 뉴타운 개발 구역이 보인다. 아직까지는 북아현동의 저지대인 163번지 일대만 공사에 들어갔지만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되면 집뿐만 아니라 고샅길 역시 사라진다. 작년까지 마을의 동쪽(한우리집 기숙사 쪽)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민가도 건설 조합의 철거 요구로 폐가가 됐다.

  북아현동에 사는 김희선(방송영상·11)씨는 “시와 건설조합이 온 동네를 폐가 촌으로 만들어 놓고서 뉴타운 계획조차 흐지부지된 상태”라며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골목길 하나하나가 아름다웠는데 이제는 유리파편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걷기조차 위험한 길이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길은 이뿐만이 아니다. 교남동, 길음동, 하왕십리동, 홍파동 옛길도 뉴타운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없어질 위기에 놓였다. 이들은 북아현동 고샅길과 마찬가지로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나 있어 마을의 모양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재개발 공사 과정에서 집이 사라지며 예전 모습을 잃었다.

  옛길이 아예 사라진 경우도 있다. 조선 시대 종로에 행차하는 양반을 피하고자 서민들이 쓰던 길인 피맛골이 대표적인 예다. 피맛골은 빈대떡, 해장국 집이 즐비해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에게 사랑받는 서울의 대표적인 옛길이다. 그러나 피맛골은 2009년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됐다.

  전문가는 옛길을 보호할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연구소장은 “프랑스 등 외국의 경우 문화․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오래된 골목이 거의 남아있지만 우리나라는 옛길 보존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옛길을 남겨둔다는 것은 다양한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옛길이 보호받지 못하는 이유는 ‘옛길은 문화재’라는 시민의식과 법적 근거 부족해서

  옛길이 보호받지 못하는 이유로는 길을 문화유산으로 인식하는 시민의식의 부족, 옛길 보호를 위한 법적 근거 부실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외국과 달리 길의 역사·문화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낮은 편이다. ‘○○로’라 불리는 우리나라 길은 대부분 물리적인 거리에 따라 나뉘어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 길이란 시와 하위 단위의 관할 구역을 용이하게 표시하기 위한 행정적 성격이 크다.

  반면, 영국·프랑스 등 유럽 국가는 ‘길’이 구역의 특색을 드러내는 실질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유럽에 스트릿(Street)의 개념이 발달한 이유다. 유럽 국가에서 스트릿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Avenue Champs-Élysées),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Avenue Las Ramblas) 등은 수세기 전부터 이어져 와 거리 자체가 하나의 관광지 역할을 한다.

  옛길을 문화유산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법적 장치 또한 마땅치 않다. 문화재보호법 제2조 제1항에 따르면 문화재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것’을 말한다. 문화재보호법이 정하는 광의(廣義)의 문화재에 옛길을 포함할 수는 있으나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해 법적으로 옛길을 보호하기 어려운 것이다.

  종로구 탑골공원 돌담길은 법적 근거가 부족해 보호받지 못한 대표적인 예다. 2011년 국가지정문화재인 탑골공원의 돌담길은 인근 사유지 주인의 사설 담벽 공사로 가로막힐 위기에 놓였다. 종로구청에 따르면 돌담길이 막히면 탑골 공원의 외관이 기형적으로 변해 문화재적 가치를 잃는다. 종로구는 문화재구역이자 관습상 도로(옛길)란 이유로 사유지 주인의 점용허가 신청을 거부했지만 법원은 사유재산 침해를 이유로 위법 항소심(제2심 판결)을 한 상태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까지 ‘길’과 관련돼 제시된 법안은 민주통합당 원혜영 의원이 발의한 ‘걷는 길의 조성관리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이 유일하다. 이마저도 올레길, 둘레길 등 국민의 건강 증진과 관련된 법안이다. 이와 별개로 옛길을 문화재에 포함시켜 적극적으로 보호하고자하는 법안은 올해가 돼서야 제안됐다. 국회사무처 법제실 미래창조교육문화법제과 백장운 법제관은 “최근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옛길을 보호하는 법안을 의뢰받아 법안 작업을 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시와 국회, 폐허가 된 옛길에 활기 되찾아 줄 수 있을까

  다수의 옛길이 이미 없어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일각에서는 옛길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는 옛길 보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서울시, 국회는 옛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법적 장치를 작년부터 마련하기 시작해 올해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시민단체 ‘문화우리’는 뉴타운 개발 속에서 옛길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2006년부터 도시경관기록보존 프로젝트(Cityscape Trust)를 시작했다. 이들은 아현동 일대를 시작으로 재개발로 사라지는 옛길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활동을 하고 있다.

  문화우리 정수현 회원은 “이상의 소설 「종생기」에 나오는 금화장길은 백범 김구 선생의 유족이 살기도 했던 곳”이라며 “아현동 주민으로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담고 있는 이런 옛길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도시경관기록보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옛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고 있다. 작년 1월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미 ‘서울시 뉴타운 정비사업 신정책구상’을 통해 대규모 개발논리와 사업성만을 좇아 파행적으로 추진되는 뉴타운 재개발 정비 사업을 수습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아현동 고샅길, 하왕십리 옛길이 있는 북아현동, 답십리 뉴타운 지구는 사업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개발이 촉진된 바 있다.

  이에 박 서울시장은 도시 기본 계획인 ‘2030 플랜’을 도심 옛 모습을 남길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해 이번달 발표할 계획이다. 이미 서울시는 현대식 빌딩과 상가가 들어선 명동에 18세기 옛길을 복원하는 사업을 올해 2월 시작했다. 2009년 역사 속에 사라졌던 피맛골 역시 복원할 예정이다.

  국회에서는 옛길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올해 2월 옛길의 현황을 파악하고 지원하기 위한 ‘옛길의 조성관리 및 개발제한에 대한 법률안’이 법제처에 의뢰됐다. 대학생 4명의 법안 건의에서 시작된 이 법률안은 법제처의 심사를 거쳐 국토해양부 상임위원회에 상정될 예정이다.

  본 법률안을 건의한 경희대 이찬행(행정·11)씨는 “옛길이 충분히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 하는 게 안타까웠다”며 “이 법이 통과돼 소송 과정에서 옛길이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생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무분별한 개발 속에서 봄을 잃어버린 서울의 옛길. 옛길을 보호하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 속에서 수 년 전의 생명력이 옛길에 다시 한 번 깃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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