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권력(6)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여성과 권력(6)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 박선영 기자<편집자주> 본지는 리더십과 영특함으로
  • 승인 2012.1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덕궁의 마지막 안주인, 망국의 끝에서 구국을 외치다
▲ 최형욱 기자 oogui@ewhain.net
▲ 최형욱 기자 oogui@ewhain.net
▲ 인정전 최형욱 기자 oogui@ewhain.net

 

<편집자주> 본지는 리더십과 영특함으로 당당하게 권력을 행사했거나 권력 암투로 무고한 희생을 당하기도 했던 여성 역사 인물에 대한 기사를 시대 순으로 연재한다. 여성권력자의 삶과 관련된 장소를 엮어 살펴보도록 한다. 이번 ‘창덕궁의 마지막 안주인, 망국의 끝에서 구국을 외치다’ 기사로 연재를 마감한다.

 박물관 지하1층에 위치한 담인복식미술관에는 대한제국 시기에 황후가 입었던 적의(왕실 적통의 여성 배우자들이 착용하는 의복)가 복원돼 있다. ‘황국’의 국모를 상징하는 황금색 적의를 입을 수 있었던 여인은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 민씨, 순종의 두 황후인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정효황후 윤씨 단 3명이었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순명효황후는 황후로 추존(대한제국 건립 전에 죽은 두 왕비가 사후에 황후로 승격)된 경우이므로 이 옷을 실제로 입은 여인은 살아 있을 때 황후에 봉해진 순정효황후가 유일했다.

 그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친일 세력에 대항하고 대한제국기의 산 증인으로서 황후의 품위를 잃지 않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세상을 떠난 1966년까지도 조선의 향수를 갖고 있던 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다. 근대 조선에서 현대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는 험난한 격동기 속에서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키고자 한 그녀의 삶을 따라가 봤다. 


△엉뚱한 곳에 복원돼 폐허된 채로 남아있는 옥인동 순정효황후 윤씨 생가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에는 순정효황후 윤씨 생가로 알려진 고택이 있다. 매년 32만 명의 사람들이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입궁 전까지 살았다는 이곳을 방문한다. 그러나 이 고택은 순정효황후의 실제 생가가 아닌 그녀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의 집이다. 서울시가 1996년 한옥마을내의 고택들을 복원하던 당시 이 자리에 있던 건물을 순정효황후 생가로 오인했다.

 순정효황후의 실제 생가는 옥인동에 있다. 경복궁역에서 나와 자하문길을 따라 걸으면 인왕산 밑자락에 위치한 옥인동 골목이 나오는데 47-133번지에 있는 가옥이 순정효황후가 실제로 살았던 곳이다.

 생가 입구의 좁은 골목 사이로 이끼 낀 낡은 돌계단이 나 있다. 언뜻 보기에는 일반적인 돌계단 같지만 궁궐의 계단에서 볼 수 있는 난간석(계단 입구에 장식된 돌)과 기단(터보다 한층 높게 쌓은 단)이 남아 있다. 이는 오직 왕족에게만 허용되는 계단 양식이다. 계단을 오른 후 위에서 바라 본 순정효황후 생가는 전형적인 ㅁ자 한옥 양식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순정효황후가 1906년 순종의 계비로 입궁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1904년 순명효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1906년 13살 어린 나이에 동궁 계비로 책봉됐다. 그녀가 세자빈이 된 데에는 명성황후가 죽은 후 실질적인 왕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고종의 계비 엄귀비와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혜민원총무 윤택영 사이의 암묵적인 정치적 약속이 배경이 됐다. 엄귀비는 자신을 뒷받침해줄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윤택영의 딸을 차기 세자빈으로 맞은 것이다.

 현재 이 생가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할 만큼 문화재로서의 높은 가치를 갖고 있지만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채 개인 소유의 민가가 들어서 있다. 처마와 마루를 제외하고는 지붕을 비롯해 대부분의 구조가 부실하다. 2007년에는 빗물에 지붕이 내려앉기도 했는데 이때 종로구청에서는 비닐로 지붕을 덮어씌우는 등의 동족방뇨식 복구를 한 바 있다. 


△창덕궁 곳곳에 남아있는 황후의 구국 의지

 후문에서 272번 독립문행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창덕궁에 도착한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된 후 창덕궁은 실질적인 정궁(임금이 사는 궁)의 기능을 해왔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1910년(경술국치)까지 창덕궁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애국지사들과 을사조약 및 한일 병합에 찬성하는 친일 관료 간의 극명한 대립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후 황제가 된 순종은 사실상 ‘허수아비 황제’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순정효황후는 순종과는 달리 황실을 위협하는 세력에 당당히 맞선 용감한 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00년 전 조선을 지키기 위해 애쓴 그녀의 흔적들이 조선의 마지막 황족들이 살았던 창덕궁에 남아 있다.
 인정문을 들어서면 창덕궁의 정전(임금의 공적공간)인 인정전이 나온다. 순종이 즉위하며 용마루에 장식한 이화문장(梨花紋章, 대한제국을 상징)을 통해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볼 수 있다.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의 정전에 설치된 서양식 전등이나 유리창은 이 시기 궁내부까지 외래 문물이 위협적으로 유입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1910년 이곳에서는 친일관료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날인을 강요했다. 이 사건은 황제로서의 권위가 무시되는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때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던 윤씨는 옥새를 치마 속에 넣어 놓고 친일관료들에게 내주지 않았다. 옥새가 조약서에 찍히는 순간 조선의 500년 역사가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윤씨의 옥새를 빼앗은 사람은 그녀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이었다. 친일파에 대항하며 한일병합만은 피하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친일의 핵심에 선 그녀의 가문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선평문을 넘어 가면 왕과 왕비의 침실인 ‘대조전’이 나온다. 순정효황후는 합일병합으로 순종의 지위가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되자 그녀 역시 이왕비로 강등되며 희정당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대조전 왼편은 순정효황후가 1920년대부터 승하 직전까지 사용했던 침대를 보기 위한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국내 최초의 스프링 침대이기도 한 순정효황후 침대는 매트리스 중앙부가 내려앉고 덮개 천이 심하게 부식되자 에이스침대 측이 문화재청의 제의를 받아 2009년 복원한 것이다.

 창덕궁 후원으로 가는 갈림길 옆에 위치한 낙선재는 화려한 단청이 없어 한옥마을의 가옥을 궁 안으로 옮겨놓은 듯 한 느낌을 준다. 1926년 순종이 붕어(崩御, 황제의 죽음)하자 윤씨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그녀가 낙선재에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읽은 한글 소설들은 그 양이 상당해 오늘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국문소설을 연구하는 핵심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순정효황후는 1950년 한국전쟁 속 인민군의 위협 속에서 낙선재를 지켰다. 대한민국의 국부(國父)를 자처했던 이승만은 국민적 존경을 받는 황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황실에 대한 예우를 지켜야 하는 대통령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윤씨를 궁궐에 내버려둔 채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 와중 윤씨는 창덕궁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이곳은 국모가 사는 곳”이라며 호통을 치며 인민군을 돌려보냈다. 이는 궁궐의 마지막 안주인으로서 황국의 유산만은 끝까지 지키겠다는 책임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전쟁이 격화되며 윤씨의 신변을 염려한 주변의 설득으로 그녀는 피난길에 올랐다. 전쟁 후 윤씨는 환궁하고자 했지만 이승만이 전후 혼란 속에서 국민을 통합시키는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던 윤씨를 경계해 환궁을 막았다. 따라서 그녀는 한동안 정릉의 수인제에서 지냈다.

 주인을 잃은 채 버려졌던 낙선재는 이승만 하야 후 마침내 주인을 되찾았다. 구황실의 사무총국장이었던 오재경은 허정의 과도정부가 수립되자 윤씨가 궁으로 환궁하도록 도왔다. 오재경의 도움으로 감격적인 환궁을 한 윤씨는 3명의 상궁들과 함께 월 17만 원(당시 화폐 기준)의 정부보조금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낙선재와 이어져 있는 처소인 석복헌에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환궁을 도운 오재경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국모로서 망국에 대한 책임감을 가졌던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은 황국의 유산인 궁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경술국치부터 현대 독재정치에 이르는 역동의 근현대사 속에서도 그녀는 끝까지 궁에 머무르며 황실의 자존심을 올곧게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