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권력(4) 숙종이 일궈낸 태평성대에 희생된 두 여인
여성과 권력(4) 숙종이 일궈낸 태평성대에 희생된 두 여인
  • 박선영 기자
  • 승인 2012.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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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이 만들어낸 세기의 라이벌 인현왕후와 장희빈
▲ 사람이 붐비는 삼청동의 끝자락에 위치해 한가한 감고당길 최형욱 기자 oogui@ewhain.net

 

<편집자주> 본지는 우리나라 역사 속 여성과 권력에 대한 기사를 연재한다. 여성권력자의 삶을 관련된 장소와 엮어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역사에서 숙종은 변덕스러운 왕이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이 변할 때마다 두 여인을 전면에 내세운 서인과 남인의 기득권이 바뀌곤 했다. 이를 환국이라 한다. 하지만 이 이면에는 서인 세력을 등에 업은 인현왕후와 남인 세력의 지지를 받는 장희빈을 이용해 특정 집단의 독주를 견제했던 숙종의 정치적 전략이 숨어있다. 숙종이 환국을 이용해 이뤘던 태평성대 속에서 희생된 비운의 두 여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따라가 봤다.

 

∆쫓겨난 인현왕후의 아픔 담긴 감고당길

 한국적 느낌이 풍기는 인사동과 아기자기한 찻집이 모여 있는 삼청동은 연인들이 찾는 대표적인 데이트 코스다. 그런데 인사동과 삼청동 사이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인사동에서 풍문여고 방향으로 가다가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위치한 감고당길이다. 덕성여중과 덕성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골목이지만 카페, 먹거리가게, 갤러리가 줄줄이 이어져 있다. 이곳에 인현왕후가 왕비에서 폐위된 후 궁에서 쫓겨나 살았던 감고당(感古堂)이 있었다.

 감고당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에 혼인 선물로 하사한 집이다. 이곳에 덕성여고가 들어서면서 감고당의 일부가 소실된 후 감고당은 쌍문동 덕성여대, 쌍문동 등으로 옮겨졌다.  쌍문고등학교가 신축되며 감고당은 다시 여주에 복원되기에 이른다. 결국 감고당길은 이곳이 원래 감고당터였단 사실을 알리는 작은 비석으로 흔적만을 남겨놓게 됐다.

 인현왕후는 서인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왕후가 된 여인이었다. 당시 서인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서인 출신의 규수를 왕후로 삼는 정치적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인현왕후는 남편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여인의 마음과 서인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왕위를 이을 원자를 생산해야 하는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허약한 건강 때문에 원자를 생산하는 데 실패한 인현왕후에게 궁녀 출신의 후궁 장희빈은 여자로서의 자존심과 정치적 책임감을 모두 무너뜨리는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장희빈은 서인을 견제하려는 남인의 지원과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원자를 낳았다. 숙종은 서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원자가 중전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에 반대하자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남인의 득세 속에서 인현왕후는 끝내 폐위됐고 감고당으로 쫓겨났다. 인현왕후는 숙종이 그를 내쫓은 것을 후회하며 왕비에 복위시키기까지 감고당에서 8년의 세월을 보냈다. 감고당은 당시 폐가나 다름없었으며 인현왕후는 식량도 제대로 구하기 힘든 생활을 유지했다.

 조선시대 한 궁녀가 쓴 소설 ⌜인현성후덕행록⌟에는 감고당에서 인현왕후가 했던 덕행이 묘사돼 있다. 인현왕후는 추운 날씨에 감고당을 맴도는 새끼 밴 개를 걱정해 헛간에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얼마 없는 음식을 나눠줬다. 이후 개는 인현왕후가 복위돼 감고당을 떠날 때까지 남인이 보낸 자객의 위협으로부터 그녀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인현왕후가 감고당을 떠난 이후 이곳에는 그녀의 후손인 민씨 일가가 대대로 살았다. 명성황후 역시 왕비로 간택되기 전 이곳에서 머물렀다. 감고당이란 ‘옛날은 느낀다’라는 뜻으로 명성황후가 고종 왕비로 책봉된 후 같은 집안 출신의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회상해 붙인 이름이다.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이란 편액을 하사했다는 설도 있다.

 

∆숙종이 희빈 장씨를 지키기 위해 마련한 보금자리, 취선당

 이대 후문에서 272번 독립문행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창덕궁에 도착한다. 왕이 정사(政事)를 돌보던 정전(정치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 선정전에 조선을 호령했던 임금의 근엄함이 서려있다. 궁의 정전을 지나 후원의 입구가 나오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이 담긴 흔적을 볼 수 있다. 키 작은 나무가 심어진 낙선재 옆의 공허한 터, 300년 전 이곳에는 숙종이 장희빈에게 선물한 취선당이 있었다.

 그간 취선당은 사극 ‘장희빈’, ‘동이’ 등에서 장희빈이 무당을 불러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장소로 묘사됐다. 그러나 취선당은 숙종이 정치적 암투로부터 장희빈을 보호하려 했던 애정이 담긴 곳이었다.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은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서인의 정치적 표적이 됐다. 서인이 희빈 장씨를 이용해 왕의 신임을 얻기 시작한 남인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임금의 사랑을 두고 한 경쟁에서 패배한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매질하기도 했고 노론(서인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당파)은 입궁 중인 장씨 어머니의 가마를 부수기도 했다.

 희빈 장씨는 취선당에서 숙종의 사랑을 받으며 아들과 함께 생활했다.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세자로 삼는다고 종묘에 고했다. 종묘에 왕실의 일을 고하고 난 후에는 어느 누구도 이를 번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완강히 반대하는 노론에 분노를 느낀 숙종은 노론을 조정에서 쫓아냈다. 이로써 남인이 집권하고 장희빈은 남인의 지원 속에서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 장씨는 서인 출신이 아닌 여인 중에서 유일하게 왕비가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숙종의 변심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자 그녀는 취선당에 신당을 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다. 이를 목격한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가 죽자 숙종에게 장희빈의 저주굿을 발고했다.
 중전에서 폐위된 장희빈에게 가지고 있던 숙종의 연민은 이 사건으로 완전히 분노로 변하게 됐다. 노론은 희빈 장씨를 사형에 처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희빈 장씨는 그녀의 보금자리인 취선당에서 사약을 받게 된다. 숙종은 이후 후궁이 왕비로 오르지 못하도록 새로운 법을 만들기도 했다.

 숙종이 서인으로부터 장씨를 지키기 위해 마련했던 취선당은 모순적으로 서인에게 돌아온 숙종의 신임으로 인해 장씨가 최후를 맞이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숙명적인 삼각관계의 장소, 서오릉

 지하철 6호선 구산역에서 내려 9701번 버스를 타고 서오릉 정류장에 내리면 넓은 잔디밭이 나온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왕릉, 서오릉이다. 서오릉에는 숙종, 인현왕후, 장희빈의 묘를 포함해 7기의 묘가 조성돼 있다.

  오릉 매표소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니 서오릉에서 크기가 가장 큰 쌍릉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곳이 인현왕후와 숙종이 함께 잠들어 있는 명릉이다. 인현왕후는 왕비로 복위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년 동안 폐서인으로 살다 왕비에 복위되자마자 죽은 아내를 가엾게 여긴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 오른쪽에 자신의 능을 마련해 인현왕후 옆에 묻히고자 했다.

 명릉의 정반대편으로 가면 초라한 묘 하나가 나온다. 후미진 구석에 위치한 작은 묘의 쓸쓸한 분위기가 왕과 왕비가 정성스럽게 모셔진 서오릉과는 상반된다. 인현왕후와 희대의 라이벌이었던 장희빈이 묻힌 대빈묘다. 장희빈은 왕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묻혔다. 그나마 원래의 묘도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에 폐허 상태로 있다가 묘소를 통과하는 도로가 생기며 1970년 현재 자리에 이장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궁들의 묘소에는 문인석과 석마(石馬)가 갖춰져 있지만 대빈묘에는 석마를 비롯한 장식물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환국의 승리자는 노론이었지만 정쟁에 희생된 인현왕후를 사랑의 승리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중에 비쳐진 이미지대로 장희빈을 악녀라고만 평가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노론의 인현왕후, 남인의 장희빈 모두 정쟁 속에서 희생당한 비운의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두 여인은 후세 사람들에게 희대의 삼각 관계 속 주인공으로 회자되며 여전히 한 공간에서 질긴 인연을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