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영원한 삶에 대한 욕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인류에게 주어진 근원적인 문제다. 불사(不死)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추구는 동양의 경우 신선 설화라는 독특한 언술체계를 낳았다. 신선의 이야기가 존재했다는 것은 우선 신선을 동경하는 신앙자와 그들의 집단이 있었음을 의미하며, 그것이 기록됐다는 것은 전승되던 이야기가 독서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선 이야기가 단지 ‘허황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어느 한 시기 한 계층에서 일시적으로 유행하고 사라졌을 것이며 시대를 거듭하여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미나 오락의 범위를 넘어 문학화된 문화라는 측면에서 신선 설화를 이해해야 하고, 문자화된 이면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총체적인 가치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 고유의 환상성을 담고 있는 신선 설화는 인간의 잠재 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현실적 욕망의 반영이다. 따라서 신선이란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신선 설화는 실제 세계를 기반으로 한 현실성과 이상향을 꿈꾸는 초현실성이 경쟁하는 서사물이다. 삶을 향한 현실적 욕망과 죽음을 넘으려는 초현실적 욕망이 끊임없이 갈등하며, 은폐된 무의식적 욕망이 의식적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삶에 대한 집착으로 표현되어 왔기에 영원한 삶, 그 초현실성을 갈망하는 토대는 바로 우리가 현실 속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이다. 현실에서 죽음이란 저항할 수 없는 것, 마땅히 순응해야 하는 섭리이다. 죽지 않으려는 원초적 욕망은 관습과 질서 속에서 억압되어 왔으나 신선 설화에서는 자유로웠다. 금기된 것에 대한 저항은 생명연장이라는 욕망으로 나타났다. 불노장생이라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면서 금기된 것, 관습화된 질서를 위반하는 심리적 지형을 반영한다.

신선 설화는 금기에 대한 위반을 보여줄 뿐 아니라 억압된 상상력을 해방시켜 준다. 상상 속 이상향에 대한 갈망이 대표적이다. 신령한 존재 혹은 초능력자의 인도를 받아서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이상향을 잠깐 방문하고 현실세계로 되돌아오니 현실 세계의 시간은 많이 흘렀고, 나중에 다시 방문하고자 하나 찾을 수 없다. 현실과 초현실 세계의 경계를 ‘환상’이라는 미적 장치로 와해시켜서 두 세계의 왕래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주인공의 주관적인 체험은 단순한 재미나 오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충분한 공감 속에서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신선 설화는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향유되는 기반을 확보했다. 억압된 욕망을 표출시켰을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부재한 것들을 충족시켜 줬다.

우리는 근대화와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가시적이고 수치화된 증거를 중시해 왔다. 합리화와 과학화에 위배된 것들을 낙후된 비현실적인 산물이라고 폄하하게 되면서 우리의 의식도 부지불식 중에 그렇게 적응됐다. 생명을 연장하고 이상향을 꿈꾸는 욕망은 물리적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지만 오히려 삶을 여유롭고 풍성하게 해줬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왜곡된 대상들이 실체화되면서 우리의 의식 속 ‘실재’의 경계가 확장된다. 로지 잭슨이 환상문학이란 문화적 속박으로부터 야기된 결핍을 보상하려는 특징을 지닌다고 했듯이, 억눌렸던 욕망이 해방되면서 상실의 감정이 치유된다. 이러한 점에서 환상은 현실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범위를 더 확장시키고 토대를 깊게 만들어 준다.

동양에서 환상 서사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실록관념이 훌륭한 문장을 판가름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서구 환상물에 대해 관심이 고조되는 오늘날, “환상이 사람의 생각(意念)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은 진정 도를 깨친 사람의 말”이라는 청나라 포송령(蒲松齡)의 논평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삶의 진실함이 투영된 신선 설화는 한국과 중국에서 환상 서사의 주요 맥락을 형성하면서 창작되어 왔다. 자연에 동화하면서 영생의 도를 추구하는 것이 도교에서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억눌린 욕망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환상 문학이 존재하는 방식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소외된 것을 채워주고, 은폐된 욕망을 이끌어내 현실사회에 수용시키려는 노력, 그것이 환상 문학을 향유하는 기쁨이 아닐까 싶다.

노자(老子)는 말로써 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도가 아니라고 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 해서 거짓된 것, 허황된 것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오히려 왜곡되고 편협하게 인식된 리얼리티의 경계를 확장시켜 준다. 눈을 감으면 더 넓은 세상이 펼쳐지듯이, 물리적인 시야 속으로 환상을 가두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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