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매일 지나다니던 골목길,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친 바위 등에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일상적인 장소, 사물 등은 오랜 기간 한 자리를 지키며 옛날이야기를 간직했다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본지는 본교 주변의 고개, 바위, 사찰을 찾아 대대로 전해져 오는 전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호랑이 소굴이었던 무악재⋯지금은 쭉 뻗은 6차선 도로

 이대 전철역에서 약20분 걸려 무악재역에 도착한 후 3번 출구로 나와 직진해 걷다보면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육교를 지나쳐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리막길이 천천히 시작된다. 이곳이 바로 인왕산과 안산을 잇는 무악재 고개다.

 현재는 곧게 뻗은 가로수 길을 따라 세탁소, 안산초등학교, 고층 빌딩 등 사람의 흔적이 많지만 무악재는 예전에 길이 험준하고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사람을 해치기로 유명했다. 당대의 임금은 호랑이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현재의 독립문이 있는 곳에 유인막(留人幕, 사람들이 고개를 건너기 전 잠시 머물렀던 막사)을 설치해 군사를 주둔시켰다. 유인막에 10명 이상의 사람이 모여야 군사가 앞장서 무악재를 건넌다고 해서 모아재라는 명칭이 생기기도 했다. 그 외에도 무학재, 길마재 등 이름이 많다.

 무악재에 관련된 수많은 이름만큼 전해 내려오는 사연도 많다. 그 중 효성 깊은 선비에 감동한 인왕산 호랑이 전설이 있다. 박태성이라고 불린 이 선비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한성에 있는 본가에서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했다.

 어느 날 박씨가 무악재에 이르자 호랑이가 나타났다. 박씨를 잡아먹을 줄 알았던 호랑이가 엎드리더니 등에 타라는 몸짓을 했다. 박씨의 효심에 감동해 호랑이가 그를 태우러 온 것이다. 박씨가 등에 올라타자 호랑이는 그를 태우고 선친의 묘소까지 달려갔다. 그 이후로 호랑이는 매일 아침 무악재에서 박씨를 태우고 묘소까지 데려다 줬다고 전해진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이 박씨를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여겨 1893년 정려비를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에 세웠고 그 부근 마을을 효자리라 칭했다. 지금도 행정명으로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가 남아 있다. 정려비는 1999년 2월1일 고양시 향토유적 제35호로 지정됐다.

 무악재 정상에서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범바위’에 관한 전설도 있다. 인왕산에 호랑이 한 쌍이 살고 있었는데 남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에게만 나타나 포성을 지르며 혼을 빼놓았다고 한다.

 어느 날 인왕산에 산불이 나 먹을 것이 없어진 호랑이들은 인가로 내려갔다. 강원도에서 온 포수가 암컷을 발견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암컷을 잃고 슬퍼하던 수컷은 범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 수컷이 바위에 머리를 부딪칠 때 바위가 살짝 깎이며 호랑이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가파르고 호랑이가 많이 다녔던 무악재는 도시화되며 경사가 완만해졌다. 1935년 일제 때 서대문에서 영천까지 통과하는 전차 노선이 신설되면서 무악재길이 확장됐고 1960년대에는 길 폭을 14~18m에서 35m로 확장해 무악재가 더 낮아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6년 11월 18일 이 도로를 6차선으로 확장한 날을 기념해 친필로 무악재를 쓰고 표지석을 세웠다. 이 표지석은 현재 무악재 고개의 정상에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노총각 장가부터 수능 만점까지⋯소원 들어주는 보도각 백불

 서대문구 홍은1동 8번지. 도로 옆에 뻗은 보도교를 건너면 사찰인 옥천암에 갈 수 있다. 옥천암 법당 옆에 위치한 보도각 백불(본명은 옥천암 마애좌상)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보도교 건너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보도각 백불은 5m 이상의 거암(巨巖)에 새겨진 관음보살좌상이다. 불상 머리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관이 쓰여 있고, 그 아래로 둥근 얼굴에 가느다랗고 긴 눈이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돼 있다. 현재 보도각 백불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돼 있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보도각 백불에 소원을 빌러 찾아왔다.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불상 앞에서 기도를 드렸고, 고종의 어머니도 아들의 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 보도각 백불에 얽힌 가장 유명한 전설은 조선시대에 늦도록 장가를 못 든 윤덕삼이라는 나무꾼의 이야기다. 나무꾼은 심성이 착하고 부모님을 잘 모셔 주변 사람의 인정을 받았지만 가난하고 나이가 많아 배필을 구하지 못했다.

 나무꾼은 현재의 옥천암을 찾아가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고 나오는데 그 앞에 위치한 계곡 바위 위에 한 노인이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나무꾼이 그를 기이하게 여겨 쳐다보니 노인이 고민이 있으면 말해보라 했다. 나무꾼은 배필을 구하고 싶다고 말하자 노인은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자하문(창의문) 밖에 서 있다가 가장 처음 문을 나오는 여인에게 청혼하라고 일렀다.

 나무꾼은 반신반의하며 자하문 앞에서 여인을 기다리는데 한 여인이 자하문을 처음으로 나오자 그에게 청혼했다. 여인은 깜짝 놀라며 꿈속에서 한 노인이 다음날 청혼을 하는 남자가 천생연분일 것이라고 일렀다고 말했다.

 나무꾼과 여인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노인을 만난 계곡 바위에 찾아갔다. 그러나 그 자리에 노인은 없고 그를 닮은 불상이 있었다. 그 불상이 바로 현재 옥천암의 보도각 백불이라고 전해진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보도각 백불을 찾는다. 평소 2~30명의 사람들이 절을 찾지만 불교의 4대 명절(입춘·4월 초파일·백중·동지)과 수능백일기도가 한창인 이맘때 특히 많은 사람이 간절한 마음으로 방문한다.

 예전에는 보도각 백불 뒤에 위치한 붙임바위에 작은 돌로 바위를 갈며 기도했지만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후에는 훼손할 수 없게 됐다. 대신 사람들은 두 손을 바위에 비비거나 머리를 맞대며 소원을 빌기도 한다. 
 주지 정경스님은 절의 개방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도각 백불을 찾는다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보통 저녁 9시가 넘으면 스님들이 주무시기 때문에 사찰에 출입하지 않는 것이 예의지만 옥천암은 24시간 개방돼 있는 기도처라서 언제라도 편한 시간에 백불 부처님께 기도드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염리동의 평화를 지켜온 개바위⋯재개발로 몽땅 없어질 위기

 이대역 5번 출구에서 숭문길을 내려가다 염리시장을 기점으로 왼쪽으로 돌면 산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이 나온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산꼭대기에 도착하면 낡은 건물들 사이로 숨겨져 있던 생명줄성결교회가 보인다. 앞뜰에 앵두나무, 모화과 나무, 어성초 등이 정성스럽게 가꿔져 있는 이 교회는 70명 남짓의 신도가 식구처럼 지내는 아담한 곳이다.

 겉으로 보면 여느 교회와 다를 바 없지만 이 교회의 지하에는 전설이 서려있는 바위가 솟아있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이 거대 바위는 개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불린 ‘개바위’의 일부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시대 철종 때 염리동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많아 창고에 곡식이 가득했다고 한다. 부자는 곡식을 탐하는 도둑을 쫓기 위해 머슴을 시켜 진도 진돗개 한 마리를 사들였다.

 “털이 하얀 백구를 데려왔구나. 영리해 보이는걸.”

 “네 대감마님. 이 녀석이 체격이 좋아 멧돼지 몇 마리는 가볍게 해친다고 합니다요.”

 부자는 집을 잘 지키는 백구를 자식처럼 생각해 정성스럽게 돌보고, 백구도 부자를 잘 따르며 주인을 위해 쌍룡산(현재 마포구 염리동과 공덕동에 걸쳐 있는 산)에서 산짐승을 잡아오기도 했다.

 그러던 20년 후, 어느 날 백구가 집을 나가더니 들어오지 않았다. 부자는 머슴을 풀어 백구를 방방곳곳 찾아다녔는데 결국 백구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쌍룡산 남쪽에 전에 없던 개 모양의 바위가 생겨났다. 그 후부터는 마을에 도둑이 없어지고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실제 개바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마포구지」와 「동명연혁고」는 개바위가 모두 쌍룡산 남쪽 끝에 위치했다고 기록하지만 「마포구지」는 27-88번지, 「동명연혁고」는 27-96번지라고 한다. 현재 생명줄성결교회 지하(27-208번지)에 있는 바위는 개바위의 일부가 남아있는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서울시는 재작년 7월8일 아현뉴타운에 속하는 염리동 105 일대 8만1426㎡부지를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결정했다. 재개발 작업이 본격화되면 개바위가 없어지게 된다. 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는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 개바위를 포함한 아현동·염리동 일대의 생활사를 기록하기 위해 재작년 조사를 하러 나오기도 했다. 

 생명줄성결교회 신동필 목사는 “아현뉴타운 재개발 조합 측은 개바위를 바위 하나쯤이라고 가벼이 여기는 것 같다”며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개바위를 많이 보러올 수 있게 구청에서 개바위 표지판이라도 세워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재개발을 하지 않고 현재 상태를 존치해 어려운 사람들이 더불어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참고자료: 「언덕을 살아가는 사람들, 아현 염리: 아현일대 공간구성과 도시민의 생활사」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