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이번 호 4면에는 4월1일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진은영 교수(인문과학원)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6편의 수상시 중 하나인「그 머나먼」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 (중략) / 멀리 있으니까 / 여기에서 / (중략) /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 더 멀리 있으니까 / 나의 상처들에서’진 교수는 인터뷰를 통해“나는 노동자의 가난과 고된 삶을 지나쳐 가기는 하지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멀리 있는 박노해가 더 좋다”고 말했다.

진 교수의 시가 나타내듯이, 박노해 시인은 그 이름 석 자로 노동자의 고된 삶을 대변해 왔다. 필명부터가‘노동해방’을 줄여‘노해’다. 1984년 출간된 그의 첫 시집「노동의 새벽」은 군사정부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됐다. 그가 민주화운동 시대의 상징적 인물로 불리는 이유다.

사회주의 운동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무기징역형을 살다가 특별사면조치로 석방된 것이 1998년. 2년 후인 2000년부터 박노해 시인은 스스로 사회적 발언을 금해 왔다.

이런 그가 작년 10월 오랜 침묵을 깨고 신작 시집을 출간했다. 햇수로 12년 만이다. 표제시이자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어두운 세상에서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작가의 간곡한 격려다.

이 한 편의 시 앞에서 진보와 보수, 노와 사 같은 이념과 빈부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박노해 시인의 다른 시를 아는지 모르는지도 상관없다. 울고 있는 손주를 품에 안고 가만히 토닥이는 할머니의 손길처럼, 이 시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다.

‘(전략) //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 (중략) //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 (중략) // 삶은 기적이다 / 인간은 신비이다 / 희망은 불멸이다 //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개인이 사회의 부품처럼 취급받고, 여기서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 돼 버린 시대다. 우리는 시「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작은 희망을 본다. 누구에게나 획일화된‘바람직한 성공’이 강요되는 현대 사회에서 작가는 조금 더 너 자신으로 있어도 괜찮다고, 희미하더라도 어둠 속에서 자기 영혼을 잃지 않은‘등불’로 서라고 나지막하게 타이른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작은 라이브카페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매일 늦은 시간까지 자고 일어나 가게에서 기타를 연주하다가, 그날 식사 값 정도만 벌면 연주를 접고 다시 느긋하게 쉬곤 했다. 하루는 그를 만나러 학창 시절 친구들이 찾아왔다. 친구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충고했다.

‘이렇게 한심하게 살지 말고 좀더 안정된 직장을 가지는 게 어때? 우리는 매일 밤낮으로 열심히 일해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구.’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렇게 준비해서 나중에 뭘 할 수 있는데?’친구들이 대답했다.‘그야, 매일 늦은 시간까지 자고, 여유롭게 기타나 연주해도 그날그날 끼니를 거르지 않을 수 있지!’

많은 젊은이들이 본인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준비하기 위해 학교를 쉬고, 취업을 미룬다. 박노해 시인은 같은 책에 수록된 다른 시「첫 치통」에서‘살금살금 비겁하게도 살지 말고 / 함부로 씹으며 거칠게도 살지 말고 / 꼬옥꼬옥 사려 깊고 단단하게 / 속도의 세상을 내 방식대로 걸어갈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만이 성공은 아니다.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본인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진정한 성공이다. 12면에 실린 카레이서 지망생 앙서연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직업을 갖는 것이 곧 성공이라는 인식만 바뀌어도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세상의 눈초리가 무서워 진짜 좋아하는 일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천천히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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